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on de Cyrene Mar 09. 2020

연인과의 스킨십에 대하여

연애의 풍경. 9화

지금 돌아보면 브런치에서 연애, 사랑, 결혼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유인 중 하나는 스킨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혼전순결을 무조건 강요하는 보수적인 의견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스킨십을 가볍게만 취급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싫었다. 그리고 남자이면서 친한 여사친들이 많았다 보니 스킨십에 대한 남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균형 있게 들어왔기에 치우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2017년 3월 28일에 쓴 [스킨십, 끝까지 가야 하나?]라는 글이 내 브런치 전체에서 조회수 2위를 기록하는 걸 보면, 스킨십은 연애, 사랑, 결혼과 관련된 주제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주제임은 분명하다.


먼저 혼전순결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사실 표현 자체도 불편하다. '순결'이라니. 어쩌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혼전순결의 문제는 영어로 premarital sex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니까. 이 표현은 마치 결혼 전에 섹스를 하게 되면 누군가가 '더럽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의 무의식은 '남자가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으면 더럽혀진다'는 인식은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이 표현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시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순결'이란 표현이 불편한 또 다른 이유는 그 표현이 마치 섹스를 다른 스킨십과 엄청나게 다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하지만 섹스도 또 다른 스킨십의 종류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러니까 그냥 하면 되지!’라고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섹스가 다른 스킨십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건 반드시 끝까지 가야만 하는건 아니란 의미기도 하다. 스킨십은 의사표현을 하고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과 의사소통 방법일 뿐이고, 그렇다면 스킨십의 종류는 두 사람에게 가장 맞고 두 사람 모두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스킨십으로 하면 된다.


물론, 섹스는 다른 스킨십과 다른 측면이 있다. 섹스는 그 결과로 인해 새로운 생명체가 잉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스킨십과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남녀를 비교해보면 특히 섹스에 있어서 여성이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경우가 많은 것은 여성들이 성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적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섹스 후에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리스크를 여성은 자신의 몸을 통해 온전히 져야 하는 반면 남자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게 당장 하루, 이틀 안에 알게 되는 게 없다 보니 남자들은 그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여자들보다 얕고 적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바뀌어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을 나 자신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줘야 하고, 그렇다면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떤 게 불편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보고 상대의 마음을 배려해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걸 조금 했다고 칭찬받아야 하거나 잘한 게 아니라 그건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원칙이다. 내가 아는 여사친들 중에는 아이를 갖기 위해 성관계를 갖는게 아닌 이상 남자친구나 남편에게는 말을 안하고 사후피임약을 항상 챙겨다니고, 관계를 가진 후에 항상 먹는 사람들도 있다. 그 약을 먹은 후유증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매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여사친도 그렇다고 하더라. 연인이라면 상대가 그런 마음을 거의 항상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단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섹스는 그러한 측면 외에는 다른 스킨십과 차이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진도'라는 표현을 써서 마치 스킨십에도 객관적인 레벨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하려고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떤 형태로든 만지는 '스킨십'이라는 것은 언어가 아닌 촉각을 사용한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그렇다면 '객관적인 기준'에서의 진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진도'라는 표현도 사실 뭔가 너무 이상하고 폭력적이지 않나? 그 표현은 마치 이걸 하고 나면 저걸 해야 하고, 그다음엔 이걸 하면서 정복해 나가야만 할 것처럼 들린다.


사실 그런 면에서는 '스킨십'이란 표현 자체도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킨십이란 표현은 사실 영어가 아니다. 스킨십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당장 미국이나 유럽 사람을 잡고 '스킨십'이라는 표현을 아냐고 물어보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정기간 이상 산 사람이 아니라면 그 표현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체적 접촉을 하나로 통칭해서 부르는 '스킨십'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무의식 중에 스킨십에는 진도가 있고, 섹스를 하면 순결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우리가 스킨십이라고 부르는 모든 형태의 신체접촉은 또 다른 의사표현 방식이다. 사실 스킨십을 연인 또는 남녀관계에만 사용해서 그렇지, 사실 직역을 하면 누군가를 때리는 것도 스킨십의 일종일 수 있지 않나?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봤을 때 모든 스킨십은 내가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수단이어야 하고 그 방법은 상대도 그 마음,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내가 하는 스킨십이 A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B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건 상대에게 B인 것이지 A일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스킨십이 아닌 언어적 표현에서 우리가 고맙다는 표현을 욕설을 섞어서 'ㅆㅂ ㅈㄴ 고맙다'라고 한다면 그게 정말 고맙단 의미인가? 아니면 욕은 하지 않아도 소리를 지르면서 고맙다고 한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침을 뱉으면서 한다면 그건 사랑한다는 의미일까?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아 그러니까 사랑한다고~'라고 하면 그게 사랑한단 말일까? 우리는 모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스킨십도 마찬가지다. 연인 간의 관계, 혹은 연인이 아직 아닌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A가 B에게 '아니 사랑하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의 표현이 되지는 않는다. 그건 마치 욕설을 섞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사전달 방식이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하고 스킨십을 포함한 모든 의사소통은 사랑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사랑에 부합하는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내 마음과 상황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면서 하는 의사소통'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싫고 부담스럽게 여기는 스킨십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이란 말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욕정에 기반한 강요에 불과하다.


스킨십에 있어서 '여기까지는 괜찮다'는 기준선이 존재할 수는 없다. 이는 사랑은 관계이고, 관계는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 간의 관계, 특정한 상황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분명한 기준선이 있을 수는 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특정한 스킨십을 불편해한다면, 평상시에는 괜찮았어도 특정한 시점에는 그것이 불평하다고 한다면 그 스킨십을 강요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노예제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도 타인의 신체를 소유할 수 없고, 그렇다면 타인의 신체에 대하여 그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냥 인간이 원래 본능적으로 성적인 욕구가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렇다면 싱글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이 모든 욕구와 욕망을 다 분출시키고 산다면 이 세상이 존재할까? 그런 논리라면 강간이나 성추행, 성폭행도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참고로 강간, 성추행, 성폭행은 법적으로 연인뿐 아니라 배우자에게도 성립할 수 있다. 이는 두 사람이 부부여도 두 사람은 독립된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는 사실이 상대의 대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스킨십은, 모든 스킨십은 아름다워야 한다. 남녀 간에 스킨십을 하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마음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열었고 더 친밀감을 느끼고 싶다는 의사표현이다. 그래서 연애를 함에 있어서 모든 스킨십은 [두 사람 모두에게] 즐겁고 행복하며 사랑을 느끼는 과정, 상대에게 그런 내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게 연인의 스킨십의 기본 중 기본이다.


 그 외에 나머지는 사실 다 두 사람에게 달린 문제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연애에서 스킨십도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어떤 기준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이유로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런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전 08화 연애에서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