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랑에 대하여. 3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사회]란 것은 없다 (there's no such thing as society)'라고 했고, 적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질서도 사실 그런 전제하에서 만들어진 경제체제다.
다만, 그와 같은 입장은 맥락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고, [사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은 '체제(system)'가 존재하는 이상 부인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사람이 들어가는 체제나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일단 사람들이 특정한 공간에 존재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그 공간의 질서나 관계에 대한 틀이나 기준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인 것이 타고난 성향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사실 무엇을 타고난 것인지 여부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은 이상, 그것이 타고난 것인지 성장과정에서 체득한 것인지와 무관하게 특정한 경향성이 있으면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그러한 경향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후천적으로 생긴 경향성이라고 해도 그걸 돌이키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인간의 사회성, 사회적인 성향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그 생물학적 한계로 인해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사막이든, 초원이든, 산이든, 인간이 자연 한가운데 혼자 고립되어 있다고 상상해보자. 인간이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사고로 인해 고립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경우도 많다는 점, 대부분 인간은 어떤 맹수와도 1대 1로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점, 그렇다고 해서 초식동물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빠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균적인 인간이 고립된 상태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로나 시대가 인간이 얼마나 사회적인 존재인지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대화도 못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힘들어했나? 코로나 블루를 겪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은 심지어 접점을 전혀 찾지 못할 것 같은 창조론과 진화론도 동의하는 지점이다! 창조론은 신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함께 하도록 만들었다는 입장이고, 진화론은 인간이 자연에서 생존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사회적인 경향성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 두 입장은 "현재의 인간은 사회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는데는 동의한다.
문제는 이처럼 '사회적'으로 지내는 과정에서는 누구도 '모든 것'을 본인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를 규범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보면, 근대국가의 헌법체계 또는 국가시스템은 모두 '개인의 자유'를 최상위 가치로 전제하지만 그러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보장된다. 헌법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기본권의 충돌'이라 부르고, 충돌하는 두 사람의 기본권을 비교해서 어느 사람의 기본권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비교하는 것을 '기본권의 경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에서 개인의 헌법상 기본권과 자유는 "침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침해의 수준에 이르지 않은 "제한"은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는 한 사회 안에, 한 시스템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우린 한 사람이 태어나서 독립할 때까지의 과정에서 선택하기보다 선택받는 삶을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본인이 대학에 지원하고, 합격하면 합격한 곳 중에서 선택해서 대학에 가고, 취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사실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상황들의 제한을 받음으로 인해 선택을 강요받고, 그 '강요받은 선택들' 중에서 상대가 본인을 선택해 주는 범위 내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선택은 엄연히 말하면 자유롭게, 100% 내 뜻과 의지로 한 것은 아니다. 우린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덜 자유롭다.
우리가 이처럼 자유를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물질, 공간, 시간 등의 재화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대학도, 기업도, 사람들을 무제한적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받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단 상대가 나를 선택해야지만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연애를 할 때의 경우, 두 사람은 모두 하루 24시간이란 제한된 시간 안에서 연인을 만나고, 공부 또는 일을 하고, 잠을 자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연인이 자신에게 시간을 충분히 쓰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상대가 돈은 많이 벌어서 좋은 곳에 데이트를 가길 원하는데, 그건 '시간'이라는 재화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일하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데,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연애를 하길 바라면서 자신과 만나거나 통화하는 시간은 늘리길 바라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닌가?
이는 결혼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를 요구하면서 일만 한다면서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도, 상대도 본인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는데 집안일을 더 할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집안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한 번도 따져보지 않으면서 전업 주부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특정한 방식으로 하지 못한다고 무조건 비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녀의 부부관계가 원활하기를 바라면서 무조건 매주 혹은 격주로 만나길 원하는 부모님들 역시 자녀들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매일 출퇴근하면서 서로 대화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은 부부가 주말에도 부모에게 종속되어있길 기대하면 그건 부부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그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연애와 결혼생활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가 포기한 것보다 본인이 양보한 것이 많거나 크다고 생각(착각)하면서, 발생한 갈등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갈등은 그 과정에서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 사람들은 애초에 왜 다투기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섭섭했던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보일 수 있는 최악의 반응은 "나 때는"이나 "우리 가족은" 또는 "내가 예전에 만났던 사람은"이란 말들로 시작된다. 그러한 반응들이 최악인 것은 그런 표현은 현재와 상관없는 과거의 일을 현재의 일에 가져다 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과거에 다른 사람에 대해 한 희생이나 포기한 것을 제삼자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남녀가 평등한 세상에서 상대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기적인가? 현재 관계의 문제는, 현재 기준에서, 내가 포기한 것만 따지고 들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어떤 것을 감수하고 포기해 왔는지를 같이 맞춰나가면서 함께 타협점을 찾아가야 한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후 관계가, 삶이 안정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타협점을 찾아야 할 지점들은 함께 살면서 곳곳에서 발견되고, 타협점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결혼하지 않으면 그런 타협과 양보를 하지 않아도 될까? 결혼을 하지 않고 마음 맞는 친구들 간에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런 문제는 모든 관계에서 발생하고,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나마 연인이나 부부는 상호 간에 일어나는 호르몬 작용이 진통제 역할을 해줌으로써 최소한의 장애물은 넘어설 수 있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그러한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기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한계도 갖는다.)
이는 누구도 100%, 모든 영역에서 본인 마음대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타협하고 양보할 지점들은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더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만 형성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관계에 쏟는 시간, 에너지, 돈을 차라리 본인 개인의 취미 등에 사용해서 행복해지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곳곳에서 갈등과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고, 우린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쏟아내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런데 결혼을 했거나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 중 상당 부분을 자신들이 속한 가정이나 공동체에 써야 하기에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물리적인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싱글인 사람의 삶이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받고, 감정을 수용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우리는 언젠가, 어느 선에서 타협하고 양보해야만 한다. 이는 관계 속에서 타협점과 양보하는 지점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상대와 본인 사이에 있는 벽을 낮추는 게 고통스럽지 않고 그 과정을 함께 만들어 갈 사람을 찾고, 만나든지 어느 정도 이상의 외로움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다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의 외로움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굴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기억하고, 조심하면서. 어떤 삶이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할지는 항상 조심하고, 본인을 돌아보는 노력과 외로움과 함께 공동체를 꾸리며 타협하고 양보하는 삶을 비교형량 하면서 판단하면 된다. 어떤 길이 더 [지속 가능한지]도 염두에 두고 말이다.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온 세상이 본인 중심으로 돌아가거나 본인은 귤 하나를 내놨을 때 상대는 집 한 채를 내놓는 것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느 지점에서 양보하고 타협해야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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