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생각하지 마"

위로 안 되는 위로의 말들. 11화

by Simon de Cyrene

우리는 언젠간 죽을 수밖에 없단 것을 알면서도 살고 싶어 한다. 아주 솔직히, 가끔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주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희망을 갖고, 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걸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터널을 지날 때, 스스로에게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내가 왜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희망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은 불확실한 반면 행복하고 즐겁다 하더라도 감당해야 할 고통과 아픔들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심지어 최악의 경우에는 행복과 즐거움 없이 고통스럽기만 한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을 듯한데 대체 나는 왜 그렇게 살고 싶은지가 이해되지 않았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종교적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논리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그 질문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죽음을, 극단적인 선택을 기꺼이, 가볍게 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왜인지는 모를 이유로 살고 싶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주위에 그전에 싸인을, 흔적을, 암시를 남긴다. 자신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단 암시를.


그 암시는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살고 싶기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와중에도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면서 '내 손을 잡아 줘'라고 하는 말을 소심하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힘을 다 해주는 표현을,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채지 못한다. 이는 많은 경우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 상대가 보일 반응이 두렵기에 그런 표현을 대놓고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나 정말 너무 힘들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을 것 같아.'라고 누군가 한다면 그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가장 무심한 이들은 '그랜, 나도 사는 게 힘들어. 사는 건 원래 힘들지.'라고 할 것이고, 그나마 나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한답시고 '그런 생각하지 마. 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돼.'라고 할지도 모른다. 전자의 경우 우리 사회의 분위기상 [죽음]에 대한 얘기를 입 밖에 내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런 말을 그저 가볍게 넘긴단 면에서 상대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고, 후자는 본인이 힘들어 죽겠다는데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버티고 살라고 한다니... 그게 사람한테 할 말인가 싶다. 그건 결국 '네가 아무리 불행해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돼'라는 말이 아닌가...


이 정도까지의 반응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힘든 지를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상대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단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자신이 수용받을 것이라는 기대보단 그런 생각으로 인해 자신이 판단받을 것이란 두려움이 큰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불효] 라거나 [지옥에 갈 것]이라면서 말이다.


내가 이토록 확신이 있는 것은 나도 직접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어서 술도 못 마시면서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면서 자취방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내면서,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한강대교를 건널 때면 '수영을 잘하는 편이니까 뛰어내려 봤자 죽지도 못하겠네. 물에 빠지면 또 본능적으로 수영할 것 아냐...'라는 생각까지 했던 시기에 난 누구에게도 내가 그 정도로 힘들단 얘기를 꺼내지 못했었다. 누구도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나를 품어주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인들은 모두 본인 인생도 힘들고 바쁘니 내가 왜 그 정도로 힘든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해하려 노력하더라도 내 상황을 제대로 모르니 공감해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상황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최소한 몇 시간 동안 내 얘기를 들어주고 앉아있어야 하는데 뭔가 내가 그렇게 누군가를 붙들고 있는 것도 미안할 듯했고, 그렇게 시간을 내 줄 사람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더라. 이는 가족 역시 마찬가지. 실패해도 된다고, 뭐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정 안되면 그냥 백수가 되어도 된다고 말해 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경쟁하고 성공하고 뭔가가 되어야만 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자란, 어렸을 때 놀이기구 타는 게 무섭다고 했을 때 사내자식이 겁이 많다고 혼났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그런 얘기들을 꺼내지 못하겠더라.


내가 유별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형적인] 한국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나쁘신 분들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부모님들보다 자녀들에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신 분들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극단적인 생각이 드는, 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 얘기를 어디에도 쉽게 꺼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온전히 수용받은 경험이 없기에, 자신의 마음을 꺼내놨을 때 상대가 그걸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생각해보자. 왜 살아야 하겠는지, 사는 게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살아야 할 것 같단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는 인간이 진지하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생각들이 반복해서 들 정도라면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면 그런 생각을 하겠나?


그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쉽게 한다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고 치자.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람이 나약해지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쌓여온 감정의 근육이 없기 때문이고, 이는 그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어떤 이유에서든 감정적으로 수용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그렇게 나약하게 된 것도 사실 그 사람이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취급당한 영향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그 사람 잘못일까?


정말로 힘들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겐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수용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건설적인 충고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회복되고, 신뢰관계가 쌓였을 때 하는 것이지 진흙탕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상태에서 건넬 말은 아니다. 죽고 싶단 생각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우리 모두 왜인진 몰라도 살고 싶어 하는데.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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