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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Feb 09. 2024

법이 전제하는 '국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 즉 법조인이나 법률가가 아닌 사람들이 법을 의식하게 되는 상황은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 번째는 본인이 법적인 문제에 연루되어 있거나 법률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이고, 두 번째는 언론에서 법원의 판단을 접할 때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경우도 굉장히 많이 접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대부분 두 번째 경로로 법을 많이 접한다. 그리고 두 번째 경로로 법을 접하게 되는 경우 그 사안들은 대부분이 형사 사건이거나 대기업, 정치인들이 관여된 민사소송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두 번째 경로로 법을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겨우 저 정도 처벌을 한단 말인가?!'라고 분노하거나 법원의 판단에 동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실제로는 법원이나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은 법원이 내리는 판단에 대해 분노하며 돈을 먹었냐, 퇴직하고 나서 대기업 변호를 하려고 하냐는 식의 비판을 하는데, 판사들도 사람들이다 보니 그런 경우가 아예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요소들이 현실에서 작용하진 않는다. 퇴직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판사라면 조금 더 의심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판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법률과 대법원 판례,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해서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앞에서 설명했듯이 사회경험 없이 판사가 되신 분들은 '반성문을 냈으니 형벌을 감경한다'라는 식으로 일반적인 국민정서와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현실에서는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법원에 판단에 화를 내는 국민들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이 걸려있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판단에 분노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국민들이 '저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법원의 판단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판단들은 왜 나올까?


그건 법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법과 법원에 판단에 분노할 때 하나의 사건과 개인만 본다. 그런데 근대 입헌주의국가에서 법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있다. 이는 법은 사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은 국가가 개인의 영역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 어떤 원칙과 가치를 갖고 개입해도 되는지를 정하고 있단 의미다. 그리고 근대 입헌주의국가의 가장 큰 특징과 원칙은 국가는 개인의 삶에 최대한 관여하지 않아야 한단 것이다 보니 법원의 판단은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입헌주의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는 유럽에서 시작된다. 이는 유럽에서 만들어진 질서를 토대로 유럽 국가들이 세계정복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법질서를 확산시켰으며, 어느 국가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따라 그 국가의 법률체계의 영향을 받았단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을 통해 법제도의 근간이 마련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판검사를 했거나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뒤에도 법을 만들고, 판검사를 지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근대'의 시작은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프랑스혁명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들이었다. 디테일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혁명들은 모두 일반 시민들 위에 군림하던 세력들이 과도한 세금을 거두고, 자신들 멋대로 법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이 지워지자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혁명의 결과는 대부분 개인의 자유와 모든 사람들의 평등이라는 이념들이 국가체제에 반영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 국가체제에서의 법률체계는 '국가가 개인의 삶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국가들은 대부분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관여함으로 인해 개인의 삶들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유럽만 그러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백성들은 관료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와 같은 원칙들로 다스리는 것에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조선 후기에는 지방관료들의 경우 대놓고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서 감옥에 가두고, 가족 중에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 재물을 내놓으라고 하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황당한가?


그렇다 보니 근대 입헌주의국가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국가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방임을 해버릴 경우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폭행을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러할 경우 사회와 국가는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힘이 센 사람이나 약한 사람,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도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피해는 입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는 현실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평등'의 개념에 대해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평등'을 갖게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법적으로 '평등'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노력하는 사람은 더 많이 가져가고, 덜 노력하는 사람은 덜 가져가는 것이 법적인 의미에서의 평등이다. 그리고 국가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수준과 결과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일 수는 없는데, 이는 그러할 경우 국가가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관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국가의 공권력작용에 의해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개인과의 관계에서는 개인이 부당한 피해를 과도하게 입은 경우에만 허용된다. 이는 국가의 개입은 적극적으로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개인이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받고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이뤄져야 한단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법과 정책은 사실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이뤄냈느냐가 아니라 국가의 개입이 필요 최소한 범위 안에서 이뤄졌는지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 


국가가 이렇게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이유는 결국 우리 사회에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총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다. 생각해 보자, A가 B를 착취해서 돈을 벌 경우 A의 자유는 극대화될 것이지만 B의 자유는 0으로 수렴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A의 자유가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법이 없어서 현실에서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의해 자유를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A가 B를 착취하는 건 사회적으로 자유의 총량을 줄이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A가 B를 착취하지 못하게 만들 법제도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가 개입함으로 인해 A의 자유가 줄어들게 된다면 그건 사회적으로 자유의 총량의 감소를 갖고 오기 때문에 국가는 국가가 개입함으로 인해 줄어드는 A의 자유보다 증가하는 B의 자유가 큰 수준까지 개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형사소송에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형사소송을 나쁜 짓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형사소송은 국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관련해서 개인을 국가가 처벌하는 것의 목적이 복수의 성격을 갖는지, 아니면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제기되고 어느 의견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형법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분명한 건 국가가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개인의 재산을 강제로 취하고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앗아가는 징역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이처럼 법은 국가를 기본적으로 '개인의 삶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전제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근대 입헌주의국가들의 법률체계의 기본원리와 원칙, 가치들은 '개인의 삶은 고려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국가'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법적인 사안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면 개인과의 관계에서 계약서가 명시적으로 있다면 그 계약서가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부당한 내용만 아니라면 계약서의 내용이 어떤 원칙보다 우선되는 것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할 자유'가 개인들에게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가 사회적 지위, 재산, 권력관계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거나 상대를 속이는 형태로 계약이 이뤄진 경우에는 그 계약서의 내용이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역시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해 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법적인 문제를 바라볼 때 그 사안만 볼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성격을 갖는' 국가가 그 사안에 개입해도 되는 상황인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도 되는지, 국가가 개입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과도하게 침해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법률이 너무 약하게 처벌을 한다고 비판을 하는데, 그건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사람도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하는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법률의 내용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심지어 헌법에도 개정 과정에서 삭제되어야 할 내용을 갖고 있다. 다만, 우리가 더 강하게 처벌하도록 법에서 정하라고 요구하거나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러한 권력을 가진 공권력은 역사적으로 개인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재산을 함부로 강탈해 간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기본적인 법률체계를 바라볼 때는 항상 '국가와 개인'의 관점에서 설명을 하고, 법률의 내용을 살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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