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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r 02. 2019

가정은 ‘감정의 분리수거함’이어야 한다.

어머니와의 언쟁

별 일이 없으면 출근을 오후에 하는 편이다 보니 가끔씩 오전에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 그런데 대화 주제가 어쩌다가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로 흘렀고, 나는 살짝 격양되어서 나의 평소 소신대로 '목회자들은 설교에 집중하고 교회 운영은 그에 맞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 하는 게 맞다'라고 말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고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는 일부 목사들에 대한 비판으로 흘렀다.


항상 그러하셨듯이 어머니는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 너 그렇게 일반화시키서 말하면 안 돼'라고 지적을 하셨다. 아무래도 목사님은 존경의 대상으로 봐야 하고, 목회하는 친동생에게도 000 목사라고 부르실 정도로 한국교회의 문화에 익숙하신 어머니는 나의 그런 비판이 불편하셨을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하기 직전에 갓 박사학위를 받은 아들에게 '박사들이 뭘 아냐? 자기 본 그 좁은 것만 아는 거지'라고 박사들을 일반화시키셔 비판하셨던 것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사실 우리 집에서 이런 대화 패턴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반복되어왔기에 '또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 이후의 레퍼토리도 뻔하다. 넌 너한테 불편한 말은 항상 듣지 않으려고 하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새지 않겠냐, 너는 애가 싸가지가 없고 언제 철들지 모르겠다 등등. 안다. 그렇게 나를 판단하시는 말들에는 나를 위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단 것을 말이다.


가정에서 이뤄져야 할 일들

하지만 과연 그런 말들이 정말로 나를 위한 것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난 개인적으로 그런 어머니의 말씀에 공감하거나 동의하진 않는다.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부터 어머니께 드리는 말씀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이다. 위 대화의 예를 들자면, 난 보통 밖에 나가서 교회들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모든 교회가 그런 게 아닌데 미꾸라지가 참 판을 흐리죠...'라던지, '그렇지 않은 목사님들이 더 많아요...'라고 항변을 하는 편이다.


사실 밖에서 난,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긴장을 하면서 산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지, 내가 한 말이 어떤 파급효과를 야기할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건 꼭 다른 사람의 말이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한 말의 의도와 뉘앙스는 전해지면서 왜곡될 수 있고, 그 말이 돌아와서 내 등에 꽂히는 화살이나 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이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해서도 안된다.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 의도와 뉘앙스가 그대로 지켜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자와 화자에 따라서 해석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을 가려가며 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라도 긴장을 하고 말조심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가정만큼은 달라야 한다. 어떻게 사람이 완벽하겠나? 밖에서 그렇게 긴장하고 여러 가지를 신경 쓰면서 지내다 보면 누군가는 어디에선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칠 필요가 있다. 운동을 하고 나면 몸에 쌓인 젖산을 제거하기 위해 쉬어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밖에서 그렇게 긴장상태로 지내면서 쌓인 감정적인 피로를 풀어낼 통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현실적으로 가정밖에 없다.


내가 가정을 '감정의 분리수거함'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휴식처'라는 표현을 쓰지만 개인적으로 그건 너무 고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휴식처에 가면 사람들은 느러지고, 햇살을 받으면서 가만히 있지만 가정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역할도 가정에 일부 필요하지만 그건 우리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배우자에 대해서 '공감해줬으면 좋겠다'던지 '내 편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쓰는데, 사실 그건 결국 '내 힘든 것을 받아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미이고, 그건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감정의 쓰레기통 또는 분리수거함이 필요하단 표현이 아닐까?


가정이 감정의 쓰레기통이라면...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 것은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쓰레기통 또는 분리수거함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가정'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설사 그걸 배우자로 해석하더라도, 그건 상대뿐 아니라 나도 상대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줘야 한단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는 내가 힘든 것을 상대에게 풀어냄과 동시에 상대가 자신의 힘든 것을 풀어내는 것을 내가 받아줘야 한다. 그리고 나의 감정적인 쓰레기를 버린다는 것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다 뱉어내고 상대는 그걸 받을 의무가 있단 것도, 상대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것들을 털어놓을 때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는 내가 '쓰레기통'이라고 한 것이 '가정이 쓰레기다'라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은 지치고 힘든 감정을 받아내는 도구가 아닌가? 이 비유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집 안에 있는 쓰레기통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집안에 있는 쓰레기통이라고 해서 그걸 그냥 방치하거나 부수는 사람이 있을까? 쓰레기통은 집안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담아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 통에 묻은 쓰레기를 닦아내고 씻어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한다. 쓰레기통이 지저분하면 사실 그 집안 전체에 그 지저분한 쓰레기의 냄새가 퍼지지 않나? 그래서 내가 가정을 '쓰레기통'이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가정은 그만큼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단 의미를 담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정을 '감정'의 분리수거함이라고 한 것은 가정은 우리가 가정 밖에서 갖고 온 잔여물들을 털어놓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친 것들을 앞에 내놓고 그 안에서 건조하고 분리수거해서 버리는 것까지가 가정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누군가가 그 쓰레기를 담아서 건조하고 분리수거해야 하지 않을까? 그건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해야 할 역할이란 것이다.


우리가 쓰레기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는 음식물 쓰레기, 일반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를 정성스럽게 다루지 않나? 그리고 그 쓰레기들을 정기적으로 정리할 때 우리 가정은 깨끗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감정의 쓰레기들을 정성을 담아서 분리해서 내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가정이 아니면 이뤄지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에 대해서는 가르치고 지적하기보다 상대의 감정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토닥여주는 게 1순위여야 하는 이유다. 현실적인 문제는 그렇게 감정적인 부분이 해소된 다음에 같이 얘기할 부분이지, 처음부터 지적질을 통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집 안이 쓰레기 더미로 가득하면 움직일 길이 보이지 않듯이, 우리 안에 감정의 쓰레기들이 가득할 때는 현실에서 가야 할 길이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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