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on de Cyrene Apr 02. 2019

이별의 정석

못된 이별을 했었다.

최악의 이별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방식의 이별을 했었다. 상대와 불편한 점이 있는 것에 대해서 혼자서 고민을 한참 하다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었다. 두 사람의 다름이라고 생각했고, 절대로 바뀌지 않을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구체적인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연인이기 전에 이미 인지하고 있던 우리의 차이가 연인이 되니 더 부딪히는 느낌이라고 얘기했을 뿐이다. 20대 후반에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일 때 했던 짓이다.


지금까지도 후회를 한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후회를 했다. SNS를 잘하지 않는 그 친구에게 페북에서 미안하다고 페메를 남기기도 했다. 이별하고 한참이 지나고, 그 친구가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생겼다는 것을 알았던 시점에 말이다. 그때라도 사과하고 싶었고, 용서받고 싶었다. 당연히 회신은 없었다. 구차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사과하고 싶었다.


이별에도 정석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할 때 '방법'을 얘기한다. 난 참으로 비겁한 사람이었어서 20대 후반까지는 문자로 먼저 통보한 적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문자로 얘기하지는 않더라도 얼굴을 보고 헤어지자는 말은 거의 하지 못했다. 주로 전화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얼굴을 보고 그 앞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말이다. 비겁한 결정이었고, 최선의 이별 방법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참으로 많이 싫어했던 적도 있지만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나약한 존재이고 본인만의 약점은 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방법' 또는 '매체'보다도 이별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통보는 문자나 카톡일 수도 있다. 비겁한 결정이긴 하지만 이별을 통보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언제나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최초의 통보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만나든, 전화통화를 하든지 간에 본인이 상대와 헤어지고자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아주 기본적인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면이 힘들었고, 어떤 면이 맞지 않았고, 어떤 면을 절대로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상대가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사실은 그런 통보를 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받거나, 상대방과 마찰이 있었다면 그에 대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식으로 말한 것이나 행동한 것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1차 녹음을 마친 오디오북에서 내가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연인은 거의 대부분을 떨어져서 지내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리고, 힘든 상황에 있으며 어느 정도는 날카로워지고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상대와 알아가기로 약속을 했다면, 상대의 그런 이유에 대해 들어주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묻고, 답하는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상대와 이별을 하기로 하는 최종 결심은 그의 설명이 납득이 되지 않거나,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에 통보하는 게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유 역시 명확하게 설명을 한 이후에. 그게 전화든, 편지든, 만나서든지 간에 말이다.


상대에 대한 예의

상대에 대해 그러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상대방도 본인만큼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통보하듯이 관계를 정리한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것은 상대가 납득하고 수긍할만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아니 사실 그 친구는 그 이후에 문자로 본인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했지만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그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건 폭력이고, 폭행이었다. 상대의 마음에 대한. 그런 과정 없이 나 혼자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상대의 말은 들을 준비도 하지 않고 결론을 통보하는 것은 감정적 폭행이 아닐까?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은 본인이 편하고 덜 힘들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힘들다. 이별을 통보하는 것도,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더군다나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상대의 얘기를 듣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분명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본인이 이별을 결정을 했다면, 그 무게는 자신이 지는 게 맞지 않을까? 본인이 그 힘든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에게는 갑작스러운 폭탄을 안기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세 번째 이유는 그 관계의 시작은 내가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를 몇 번 해보지 않았거나 아주 어린 나이라면 기본적인 예의를 차리지 못하는 것이 용서될 수도 있다. 이는 감정적인 부분을 수반하는 연애의 특성상 본인이 이별을 통보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그 감정적인 상태를 잘 통제하지 못하는 미숙한 나이이거나 경험이 적어서 그러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면 한두 번 정도는 그럴 수도 있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까. 그런데 일정 나이 이상인 사람이 '그걸 다 말하는 게 힘들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상대가 강제로 감금을 해서 시작된 관계가 아니라면, 본인이 시작하기로 결정한 관계는 본인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통보하는 사람에게도, 그걸 듣는 사람에게도. 그렇다면, 그 수준과는 무관하게 어느 정도라도 본인의 마음을 상대에게 줬다면, 상대의 마음을 받았다면 내가 조금 덜 힘들 수 있는 방법보다는 상대의 마음도 헤아려주는 것이 어른들의 연애가 아닐까. 그게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이전 27화 가정은 ‘감정의 분리수거함’이어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