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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

by 키튼

지난주 주말, 거의 8년 만에 대학교 동기들을 만났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들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동기를 만나는 걸 피했다. 이번에도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하지는 않을지 초조하기까지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도 같은 학번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외과 친구의 사연은 너무 안타까웠다. 간이식을 전공 한 친구였는데, 결핵 환자를 기관 삽관하다가 본인이 결핵에 걸렸던 이야기, 그렇게까지 고생을 해서 3년간 펠로우를 했는데, 교수 임용에 실패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했다. 또 장래가 촉망되던 어떤 선배는 급성 백혈병에 걸려서 투병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함께 만난 가정의학과 누나는 아들 둘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바쁜 와중에 개업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개업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불안하고 초조한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때 찬란한 미래를 꿈꿨지만, 냉혹한 현실을 목격한 상태였다.




20대 때에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나는 굉장히 의존적인 성격이고 (지금에 와서야 인정하는 부분이다) , 나의 의존적인 면을 인정하기보다는 친한 친구와 애인에게 쉽게 배신감(?)을 느끼고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라고 생각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화가 나있었던 시기였다.


그때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생님, 어차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혼자입니다.
인간은 모두 외로워요. 하느님도 외로워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줄 아셔야 돼요.
자신 만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것은 큰 욕심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는데,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우린 인간이기에 아무리 친하더라도 (심지어 가족 사이라도) 서로의 외로움을 완벽하게 위로할 수는 없다.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무한정의 공감을 요구하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됐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에대한 기대를 버릴 때야 비로소 타인과 더불어 살 수 있다.




각자 인생의 고달픔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때 그렇게 특별해 보이던 친구들도, 모두 각자의 고민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쉽지 않은 것이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어디선가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따뜻해지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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