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끝!
여전히 멋진 꿈을 꾸고 있지만, 이제는 망상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미국 의학 드라마 속에서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는, 지적이고 세련된 저의 모습 말이에요. 사실, 이 망상을 버리려니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즐겼던 취미 중 하나였을 테니까요. 현실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저기 어딘가에는 자유롭고 멋진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저를 위로해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힘들고 벅찰 것입니다.
저는 왜 미국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왜 한국에서의 제 모습이 못마땅했던 걸까요? 결국, 모든 것은 인정 욕구에서 비롯되었고, 그 욕구가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거의 한 달 동안 짐을 정리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왜 그렇게 쓸데없는 물건들을 많이 샀던 걸까요? 1년 반 동안 짐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려서인지, 모든 것이 버겁게만 느껴졌습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 거라 믿으며 샀던 모든 것들, 타인의 인정을 바라며 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제 삶을 복잡하고 번잡하게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행복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번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가득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남들이 알아주는 거대한 성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이제는 100% 공감합니다.
어찌됐든, 저는 제 자신이 대견합니다.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목표한 점수를 얻었습니다. 처음 마음먹었던 그곳까지 와보았습니다. 중간중간 포기하고 싶었고, 남들 다 쉬는 날 독서실에 앉아 있는 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순간이, 저의 젊은 날 마지막 열정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늘 스스로를 자책하며 깎아내리는 걸 즐겼습니다. 그게 왠지 객관적인 태도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제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사랑하고, 대견해해도 괜찮습니다.
USMLE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저를 믿게 되었다는 것. 저는 제 자신을 가슴 깊이 신뢰합니다.
이제, ‘행복한 시지푸스’가 되어보려 합니다.
매일 같은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지긋지긋한 반복이겠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보려 합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려 합니다.
환자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가는 것. 보호자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전하는 것.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동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작지만, 이 변화들이 모여 저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 믿습니다.
"자전거를 타면 용기 있는 사람이 돼.
내가 이런 산도 다녀왔는데 이 일을 못 하겠어?
내가 그만큼 멀리 가봤는데 이것도 못 참겠어?"
— 《매일을 헤엄치는 법》, 이연
저는 이제,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