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_바라나시 갠지스강과 가트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던 스물. 어딘가를 가고 싶다는 마음보다 해외를 간다는 설렘이 더 컸다. 어쩌다 가게 된 3주 여행이 1년 살이로 발전했던 나라는 '인도'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여행지는 여행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나라였다. 그렇게 나의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몰랐기에 가능했던 여행이었고, 혼자가 아닌 우리여서 가능했다. 같은 여행지를 두 번 방문하지 않음에도 이 도시 때문에 살기까지 했던 의미 있는 곳이 있다. 이곳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바로 인도 북부에 위치한 '바라나시'로 갠지스 강과 가트가 유명한 지역이다.
바라나시는 갠지스 강 중류에 자리하며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로 여겨진다. 가트는 강변과 맞닿아 있는 계단을 말한다. 가트 밑에선 힌두교도들이 강물을 머리 위에 붙는다. 누군가에게는 더러운 물일지 모르지만 힌두교도에게는 죄를 씻을 수 있는 성수이다.
최근 인도 바라나시 여행을 하는 방송을 보며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트의 풍경은 여전했다. 바라나시는 그 당시에도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도시였다. 갠지스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일으켰고, 그곳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약간 해가 질 무렵. 바라나시에 숙소에 도착한 일행들은 지쳐서 쉬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동갑이던 친구 2명은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숙소를 나와 릭샤를 타고 가트를 향했다. 가트에 도착해 강을 구경하는 보트를 구하려는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싸게 줄 테니 타라고 하셨다. 싸다는 말에 혹해서 의심 없이 따라갔는데.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할아버지가 가진 배는 작고, 노를 저어 가는 배였다. 4명이나 탈 수 있는 배인가라는 의심이 들었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이거 괜찮은 거예요?"
"노 프라블럼"
배는 강의 중심부를 향해 다가갈 듯 말 듯 그렇게 갔다. 근데 이상하게 발 밑이 축축해졌다. 문제가 생겼다. 배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는지 배 안에 물이 들어왔다. 몸 안에 있는 위험 신호에 불이 들어왔다. 삐뽀삐뽀~~ 너무 놀란 우리는 바닥에 물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거예요?"
"노 프라블럼"
'할아버지야. 당신만 괜찮으면 다냐. 우리는 안 괜찮은데.'
배 밖에 풍경은 이미 가트를 한참 떠나서 사람들이 작게 보였고, 해는 점점 지고 어둑어둑해졌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원래 이런 일이 많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발 한 짝으로 배에 조금씩 차오르던 물을 퍼서 강으로 버렸다. 그러다 다시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환장할 노릇이다. 제발 그만 가세요.
밖에 풍경을 볼 여유가 없었다. 강 위에 개 시체가 둥둥 떠있는 것을 보았고, 물속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탕물에 깊이가 어느 정도 인지도 알 수 없다. 이 강물에 빠지면 죽는 거 아닌가 라는 공포에 제발 가트로 가자고 할아버지를 설득했다. 겨우 가트에 도착했고, 할아버지는 가트로 돌아올 때까지 신발로 배에 들어오는 물을 퍼내셨다. 나중에 살면서 알게 된 거지만, 인도 사람들은 모든 일에 '노 프라블럼'이었다. 습관처럼 하는 말.
다음날에 다시 가트를 찾았다. 아침 일찍 찾은 갠지스강 가트에 풍경은 기괴했다. 길게 이어진 가트를 걸어가는데 한쪽에서는 소의 분뇨로 만든 연료를 만들어 벽에 붙였다. 가트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앉아서 사리를 입은 여인들이 가져온 빨랫감을 방망이로 때리며 빨래를 한다. 그 옆에서는 목욕을 하러 강 안에서 들어가 헤엄 치는 사람도 있다. 오만가지 장면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다음 가트에는 뿌연 연기가 올라온다. 쌓은 나무 장작 위에 죽은 사람을 올려놓은 뒤 불을 붙인다. 시체를 태우는 장례 행위였다. '버닝 가트'라고 불리는 곳에는 성수라 불리는 갠지스강에 적신 시체로 잘 타지도 않는다. 이곳은 매일 시신을 태우는 풍습이 행해진다. 고대 베다 시대부터 굳어진 독특한 힌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머리에 과부하가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배를 구했다. 가트를 걸어가며 보았던 풍경이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로 가니 한 번에 보였다. 옆에서 시체가 타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 일들을 하느라 분주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어색한데 조화로운 느낌이었다. 한 번에 보니 알겠다. 이곳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갠지스 강 한가운데서 현실만 보고 사느라 떠오르지 않았던 '죽음'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한쪽만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함몰된다. 삶만 사느라 정작 중요한 죽음은 생각하지 못했다. 영원을 살 것처럼 살아가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죽음이 언제나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간다면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까.
여행이 주는 선물은 이런 함몰을 막아주는 '새로운 시각'이다. 같은 상황에서 '노 프라블럼'이라고 외치는 할아버지와 문제로 바라봤던 나는 다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장례식장 옆에서 생활하며 살아가는 기괴한 일상은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내 시선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견이 깨진다. 한쪽으로 기울었던 생각 추는 다른 쪽으로도 기울어진다. '노 프라블럼'의 시각을 상기시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