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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몽 Jul 06. 2024

마흔,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마흔 탐구생활 시작: 안녕, 마흔

버스를 탔는데 앞에 앉은 여자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 사이에 살짝살짝 보이는 흰머리가 유독 잘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흰머리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스물이 넘었다. 염색을 거부하는 흰머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대단하다.     


서른일곱.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려고 넘기는데 흰머리가 뚜렷하게 보였다. 아아악!!! 괴성을 질렀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흰머리가 나도록 열심히 한 걸까. 드라마 보조작가를 하다가 드라마가 무산되면서 백수가 되었던 시절이다.      


다른 건 몰라도 흰머리만큼은 나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내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때 힘들었던 시간을 증명하듯 정수리 부근에 떡하니 4가닥에 흰머리가 길게 자라났다. 그때부터 흰머리를 찾던 습관이 더 집착적으로 변했다.

      

흰머리의 원인에는 스트레스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노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마흔부터는 본격적으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머리에 흰머리가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피부 탄력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조금만 많이 먹어도 살이 찌고 안 먹는다고 살이 빠지지는 않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겠지만.    




이번에 출판 창업 수업을 들으며 습관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에 순간 흠칫했다. 열심히 하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초반에 힘을 주다 보니 끝까지 못 가는 것이 문제기 때문이다. 아.. 힘 빼 힘 빼!!! 나이가 들수록 힘을 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모든 일에 힘주다가 정작 중요한 일에 힘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렁설렁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했는지 이제야 느낀다. 처음부터 힘들게 노! 력! 하며 궁서체로 각 잡고 시작하다 내가 가장 먼저 튕겨 나갔다. 


예전에 읽고 공감을 많이 했던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를 다시 읽었다. 저자는 열심히 살았지만, 보상받지 못했던 시간을 통해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내가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세상이 쪼개지거나 멸망에 이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어졌다.  

    

열심히 사는 거 좋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결과나 보상이 없는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열심히 했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하며 무너지기 싫다. 적당히 살면서 흰머리를 늘리지 않으며 일하고, 살고 싶다. 예전에는 열심히만 해서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나는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마흔부터는 전략적으로 에너지와 시간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예전보다 쉽게 지치게 되는 나이에 더욱 힘 분배가 중요하다. 강약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마흔을 눈앞에 두고 겨우 느끼는 것 같다.  


안녕 마흔. 너를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우리 한번 같이 가보자. 마흔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거니까. 흰머리까지 받아들이는 그날까지 친해지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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