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열심히 사는 것도 뻘짓이 될 가능성이 높아 그만두어야 하지만,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다. 한번뿐인 인생, 대충 살면 어떡하나? 그 책임은 아무도 져주지 않는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행복하지 않은 것이니, 반대로 대충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분위기가 우려 된다. 힘들었던 이유는 타인이 짜놓은 프레임대로 살려고 애써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그래서 애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힘들었던 원인을 제거하고 나에게 필요한 전략을 짜는 것이다.
자기다움이란 어떤 특정한 ‘멋진 상태’도 아니며, 있어빌리티를 확보한 상태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만 자기다움이다 라고 선택적으로 지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도 자기다움이다. 예를 들어, 훌륭하고 멋진 모습은 나다움, 찌질하고 우울한 모습은 나답지 않음, 이렇게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진짜 자기 모습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일부를 애써 부정함으로써,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부작용이 크다.
마음에 드는 내 모습, 마음에 들지 않은 내 모습 모두를 온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 충실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것이 ‘나다움’이구나, 이것이 ‘나다운 삶이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누구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나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살아간다.
누군가가 선택적인 모습만 나로 인정해준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된 거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을만한 모습만 나로 인정할 필요도 없으며, 인정 못 받는 모습을 가진 나를 미워할 필요도 없다. 그 모습이 존재하는 것은 잘못된 것도 아니며, 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냥 나의 모습의 일부다. 그 일부를 나의 존재 전체로 확대해석할 필요도 없다. 그 일부분이 나에게는 어떤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함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만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 외에 불필요한 판단은 쓸데없다. 평가와 판단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 이제껏 지나치게 많이 했다. 나에게 도움은커녕 나를 킬링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젠 나 스스로가 나의 지지자가 되어 줄 때이다. 이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이 세상에서 나의 잠재력을 펼치며 살아가기 위하여.
“나를 사랑하자”는 말을 자주 듣다보니 어느새 구호같이 들린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Must 명제가 되고 있다. “나답게 살자”의 연장선에 있는 이 말이 나는 불편하다. 마치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나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조장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듣다보면 이 달콤한 말도 “자존감을 높이자”처럼 들릴 것만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결과이다. 점차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며, 우리가 이번 생을 살면서 점차 획득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에 대해서는 생각해보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내려 본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삶의 어느 시점에 멈춰서 나를 살펴보니, 나는 예전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고, 나랑 더 잘 지내고 있으며, 내가 더 좋은 느낌이 든다. 10년 후에는 오늘보다 더 나랑 편할 것 같다는 느낌. 이런 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느낌이 아닐까.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마치 3초만에도 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랑을 지키고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자기사랑도 마찬가지다. 일(day) 단위로 매일매일 나를 더 사랑해야지! 이런 초단기적인 접근이 아니라, 1년, 3년, 5년 정도로 점검하는 방식의 장기적 관점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 그 마음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를 사랑해야지’ 마음먹고 나를 사랑하려고 또 노력하지만, 대부분 그 노력이 근본적 해결책이 되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사랑도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사랑을 막는 원인을 그대로 둔 채, ‘나를 사랑하기’만 덧칠해봤자, 원인은 그대로 남아 나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잘 살고 있다고 느끼다가도 왠지 모르게 상실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면 ‘자기사랑’이나 ‘힐링’으로 고통을 덮을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해오고 있는 ‘셀프킬링’(원인)을 찾아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자기사랑을 가로막는 원인인 셀프킬링은 그동안 우리가 갖고 살아온 수많은 must/should로 구성되어 있다. 20대에 흔하게 만나는 셀프킬링 세 가지를 소개한다.
- 좋은 회사에 다녀야 해 - 나는 연애 상대방에게 잘 보여야 해 - 나는 혼자여도 괜찮아야 해
많은 사람들이 이 Must/Should 대로 살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판단/평가내리며 자책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나에게 했던 수많은 자책의 말들,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느꼈던 자괴감의 출발점은 사실 타인으로부터 내사(introjection)된 메시지다.
<내사(introjection)>
내사(내적 투사, 투입)란 프로이트가 제시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의 한 유형으로, 타인의 생각과 신념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특히 이런 행동은 외부의 권력자(부모)의 신념을 내면화하는 것이 전형적이다.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상실(loss of self)하는 대가를 치루는 현상이다. 즉, 우리를 끊임없이 검열하는 주체인 초자아(superego)는 내사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초자아의 유래는 어린 시절 나에게 중요했던 타자(부모, 선생님 등)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사된 타인의 목소리를 소화하여 내 안에서 재생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행동의 원천인 동기(motivation)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엄마의 신념은 나의 초자아(superego)가 되어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엄마는 내사(introjection)를 해놓았기 때문에, 일일이 신념을 주입할 필요가 없게 된다.
내사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부모님, 선생님, 미디어 등, 내가 주로 듣고 보고 자랐던 환경에서 나에게 주입한 메시지들을 그대로 갖고 살아가며 언젠가부터 내가 나에게, 그들이 나에게 고통 주었던 방식 그대로, 어쩌면 더 아프게 고통을 주게 된다.
자유 시간, 즐거움, 휴식, 사람들과 얘기하는 시간 등등 내가 좋아하는 가치를 추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을 가지며 성장해왔다. 연봉, 학벌 등 가치를 수량으로 환산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척도가 수량적인 것 밖에 없지는 않다. 사실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사회는 수량화시키기 좋은 획일적인 잣대를 선호해왔다. 소나무는 잣나무보다 우월한가? 이건 대단히 웃긴 얘기다. 좋은 사람을 정의하는 기준은 천차만별의 가치관, 수천 개의 척도로 이뤄져 있는데, 소나무와 잣나무의 우월을 가리는 것처럼 사람을 급(level)으로 나누어 서열화 하다 보니 수치화할 수 있는 연봉과 같은 획일화 된 척도가 공정한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 사회적 현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삶의 모습은 제각각 다르다. 굳이 수량화해서 순위를 매기는 데 동참할 필요가 있을까.
호랑이는 토끼보다 우월한가? 가뭄이 와서 식량사정이 안 좋아지면 토끼는 존버할 수 있지만 호랑이는 제일 먼저 굶어죽는다. 호랑이는 풍성한 생태계에서 많이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반면 토끼는 소량의 풀로도 생존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가뭄이라는 환경에서는 토끼가 생존에 유리한 것이다. 생물의 가치를 피라미드처럼 정하는 것은 무력을 절대적 척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성적, 연봉을 적용한 것도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하나의 척도보다 인간의 삶은 훨씬 다양하다.
사실 획일화는 허구의 개념이다.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획일적으로 생기지 않았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내사시킨 타인이 그 사람의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행위는 그 사람 생각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권한은 있다. 다만, 성인이 된 나는 나에게 중요한 가치관에 따라 독립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만들어진 목소리라고 해도 무조건 평생 함께 살아야하는 건 아니다. 내사된 목소리를 걸러내고, 내 안에서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것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제 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 수능으로 우월을 가리는 경쟁 프레임, 즉 우월성(superiority)이 더 중요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자유가 있다.
지금 벗어나지 않는다면, 30대에는 결혼, 육아, 자녀의 교육수준 등등 동일한 프레임 속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삶이 아니라고 믿는다. 우월성을 핵심가치로 갖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나를 셀프킬링 해왔다는 사실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는 지 한번 멈춰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내사된 목소리를 계속 가지고 살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