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전에 셀프킬링, 그만하기로 해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상실감의 근원

나의 감정은 늘 옳지만, 나의 생각에는 오류가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틀린 생각 중에 많이 하는 생각은 ‘이건 다 내 탓이다’. 자책은 한 치에 의심도 없이 나의 뇌를 장악한다. 아주 자동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 온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 왜 그렇게 살아?”
“너 옷이 왜 그래?”
“너 얼굴이 왜 그래?”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얼어붙는다. 속으로 ‘이게 뭐지?’ 그리고 바로 생각한다.


‘아 내가 이상하구나.‘


그런데 사실 그의 말에 상처받았다. 농담처럼 무심코 던진 말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말로 인해 상처받았다면 상처받은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 나에게는 가시로 박힌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등 나의 고통에 기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을 탓해야 한다. 상처 받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가 잘못한 것이다.


그럴 때 화살이 나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아야한다. 자동적으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구나.’로 자책하고 쭈그러들고 쓸데없이 예민한 나를 탓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왜 그렇게 말해?’ 의문을 던지고, 필요하면 싸울 수 있는 내가 되면 좋겠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내 감정은 그 말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예민하다 아니다를 가르는 것 자체도 웃긴 말이다. 사람마다 느낌의 종류, 강도, 빈도 다 다르다. 누가 누구보다 더 예민하다 아니다를 가르는 건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나는 예민하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예민하니까 건드리지 않아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민한 게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누구보다 예민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그 느낌을 어떻게 해석하고 처리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상실감의 근원은 경쟁프레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뇌에 각인된 것은 수학능력시험 시스템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했다. 같은 년도에 대학 들어갈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indicator로 줄 세우기. 서열이 교육의 목적이므로 극소수의 승자와 절대다수의 패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같은 현상이 인생을 살면서 반복된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프레임 안에서 살아온 우리는 어느새 경쟁구도에 참 익숙하다. 공부 잘 하는 형제랑 나를 비교하는 엄마, 자기계발에 도움이 안 되면 쓸데없다고 혼내는 아빠, 우반/열반 나눠서 성적으로 줄 세우는 학교 선생님, 돈 잘 버는 게 인생의 절대가치라고 주입한 세상.


공부 못하는 나는 혼나야하는 존재
공부 잘하는 동생보다 나는 열등하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 나
부모님/선생님/사회가 정한 표준에서 벗어나면 혼났던 나
이해받고 싶었지만 매번 좌절됐던 나
공감보다는 비난의 연속으로 상처받으며 지워진 나


고등학생까지는 무조건 대학만 생각하라고. 국영수만 파도록 주입식 교육을 퍼부어놓은 사회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책임지지 않는다. 객관식형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놓고 이제는 주관식을 잘 푸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세상에 정답은 없으며, 정답을 스스로 만들란다. 그게 말이 되는가? 다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놓고, 남들과 다른 나만의 차별점을 만들라는 세상. 너무 무책임하다.


문화인류학자 김누리 교수는 한국 사회의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로 특징지어지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던졌다.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살 사회’로 굳어진 것은 바로 한국 사회가 ‘자기착취적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회적/심리학적 구조를 정확히 투시해야 합니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부단히 전가하는 지배자들의 기만적인 논리를 내면화하고 신념화해서는 이 사회를 변혁할 수 없습니다.

- 김누리 교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대통령은 내놓고 비판할 수 있지만 사장은 비판할 때 마스크에 음성 변조기까지 사용해야하는 나라, 사립대학 비중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재단 이사장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는 나라, 기업의 소유주가 모든 걸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해고도 거의 마음대로 하는 나라, 노동자의 존엄성이 존재감을 찾기 어려운 나라, 교수는 진리의 독점자에 위치하는 나라, 엄청난 액수의 대학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녀야하는 고등교육을 확보할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제도적으로 이런 각종 비민주주의를 허용하는 기형적인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비민주적인 사회에서 강요하는 획일적 줄 세우기, 그를 위한 각종 억압으로 인해 개인이 느껴야하는 자괴감의 무게는 날로 커져왔다. 엄친아, 엄친딸은 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 하에서 엄마 친구 누구는 OO대학을 나와서 OO회사를 다니고 OO이랑 결혼했다더라. 돈, 학벌, 외모, 직업, 결혼 등 경쟁프레임이 내면화 된 나는 주눅 든 나를 만든다.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
요즘 애들은 꿈이 없어.


말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이건 다 비난의 말이다. 나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지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열심히 안 하고 싶다면 안 하고 싶은 이유가 존재한다. 그런 나에게 비난의 말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이런 말을 듣고 저항하거나 화내지 못한다면, 나의 내면에는 분노가 자리 잡는다. 사실 우월성을 가리는 흔한 잣대 중에, ‘누가 더 좋은 직장인인가?’는 대표적인 허구의 개념이다. 획일적 줄 세우기 프레임이 좋은 대학에 이어 좋은 직장, 좋은 직장인들의 줄 세우기를 만들어 내니,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부당하다고 화를 내고, 따져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이 세상 밖에 표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분노의 마음을 꺼냈다가도 수용되지 못하는 날이 쌓이면 결국 지치는 날이 온다. 비난을 자꾸 받다보면 내가 정말 비난받을 만 한가보다 착각하게 된다. 극소수의 승자 pool에 합류하지 못한 절대다수는, 패자의 프레임에 갇혀 인생 전체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본적이 있을까? 애초에 사회가 주입한 경쟁프레임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외부적 경쟁자극이 없어지는 순간 경쟁프레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이제라도 내 발로 사회가 만들어놓은 획일적 줄 세우기의 무한루프에서 나오자. 줄이 없어져도 묶여있기를 선택하는 무기력한 코끼리가 될 필요는 없다. 이젠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어차피 사회가 나를 책임져 주는 게 아니라서, 내 살 길은 내가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라서. 하루라도 빨리 그 줄에서 이탈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평가 프레임을 갖고 살아가면서, 내가 가지지 않은 것만 보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건 한 개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순간이 많다. 수능으로 우월을 가리는 경쟁 프레임, 즉 우월성(superiority)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우월하지 않으면 어떤 것을 가졌더라도 별 게 아니다 라고 착각하고 고통스럽다.


1등만 인정하는 세상, 100점을 우대하는 세상은 그대로일 지라도,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성인이라면 이제 내가 나의 삶의 모양을 만들어 갈 자유가 존재한다. 지금가지 내사된 가치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가치관을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볼 수 있다. 만일 내사된 가치관을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선택한다면, 그것 또한 나의 선택이다.


주입된 가치관을 걷어내고,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양인지 성찰해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내 삶은 내 것이 되어간다.

습관적으로 내가 나를 낮추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듣고 자란 탓에 겸손한 게 멋진 것, 인간은 자고로 겸손해야 한다는 관념도 함께 새겨졌을 수 있다. 그런데 겸손도 지나치면 하대로 변질된다. 내가 나를 진짜로 하찮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셀프킬링의 하나다. 이것부터 그만두면 좋겠다.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면, 남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를 함부로 대할 권리를 내주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쭈구리로 있으면 ‘너 옷이 그게 뭐야’와 같이 함부로 지적하는 사람이 생긴다. 또 다른 예로, 쓰레기 짓을 하고도 당당해하는 직장 상사가 나타난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자꾸 이해해보려 하지 말자. 나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삶에 필요한 것들을 이미 갖고 살아가고 있다. 노동을 통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 인간으로서 기능을 충분히 하는 건데 왜 자신을 무쓸모라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왜 시도 때도 없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 나보다 빛나는 누군가를 보며 나의 열등감만 재확인 하며 고통을 재생산하는걸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셀프킬링 하느라 에너지가 바닥나니 자꾸 힐링이 필요하다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시급한 건 순간의 힐링으로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뿌리를 찾는 것이다. 힐링은 반창고일 뿐이다. 진정 염증이 생긴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염증은 재발한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가 왜 고통을 반복해서 느끼고 있는지 셀프킬링 포인트를 정확히 찾아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셀프킬링을 습관적으로 하는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절대명제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나를 어떻게 킬링해왔는지 한번 펼쳐놓고 보자. 그 절대명제가 진짜 맞는지?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검증해본 적이 없다. 어느 순간 내사된 그 절대명제를 내 몸의 일부처럼 달고 살아왔다.


이 절대명제는 생애초기에 주입된 이후로 한 번도 객관적인 검증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만의 성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린 시절의 나는 생존하기 위해서 그냥 그 말을 따랐을 뿐이다. 그 말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고, 아닌 것 같아도 아니라고 저항도 못하고, 말했다가도 내가 틀렸다고 혼나고 포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의 나는 성인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에 필요한 가치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다. 내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면 나는 나의 자율성을 찾아간다. 자율성은 기질처럼 한 번 유전자에 새겨져서 평생 가야 하는 고정 값이 아니라, 내가 만들기에 따라 단단해질 수 있는 인간의 성격 특성이기 때문에.



글: Chloe Lee

그림: pinterest, vsc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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