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 중독: 나는 잘 해야 해

나는 실패작이다라는 불안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성취와 관련된 인상깊은 장면이 있었다.


야구 톱스타 김재혁 선수가 어깨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후, 야구를 다시 시작하며 절친 준호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준호야, 나 야구 다시하면 양현종보다 더 잘 던질 수 있을까? 다시 했는데 현종이보다 못 던지고 ... 계약금도 최고로 못 받고... 구속도 제대로 안 나오면 어쩌냐? 마운드 나갔는데 1,2년차들한테 홈런맞고 하면 강판 당하면 어떡하지? 나 다시 야구한다고 하면...다들 기대 엄청 할텐데...1군에서 제대로 던지지도 못하고 2군으로 떨어지면 어떡하냐? 나, 전처럼 그렇게 잘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준호는 예전처럼 최고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재혁에게 뼈 때리는 대사를 선물한다.


“못하면 2군가고. 2군가서도 못하면 은퇴해. 재혁아, 세상 사람들이 하루 종일 니 생각만 하고 살지 않아. 다 자기 인생 살기 바빠. 너에 대한 관심, 기대, 그거 길어봤자 한 2주 본다. 그리고 재혁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너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 별로 안 높아. 그니깐 걱정 그만하고 그만 불안해 해...꿈은 이렇게 좀 현실적으로 꾸는 거야. 아니 언감생심 뻔뻔하게 양현종한테 비비냐 비비기를! 양심이 좀 있어라.” <슬기로운 감빵생활> 6화


재혁의 걱정을 살펴보면 항상 비교 대상에 따른 절대명제가 존재한다.


현종이보다 못 던지면 → 현종이보다 못 던지면 쓸모없음

최고로 → 최고가 아니면 쓸모없음

제대로 → 제대로 하지 못하면 쓸모없음


특정 대상과 나의 성취를 비교하는 모습, 더 나아가 최고를 추구하는, 성공을 쫓는 모습은 비단 톱스타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모습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 뿐”

“실수하면 안 돼”

“실패는 용납 못해”


이상이 높아 나에게 엄격한 나에게 나타나는 인지적 왜곡은 다음과 같다.


<이분법적 사고(Dichotomous reasoning)>
연속상의 개념은 없이 양극단의 점만 존재하는 사고
흑과 백, 성공과 실패 등 두 가지의 결과만 존재한다는 논리를 가짐


성공하지 않으면 실패야. 내가 하는 모든 일에는 실수하면 안 돼!라는 강압적인 이분법적 사고는 ‘실수’라는 ‘내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을 범한 ‘나’ 존재 자체를 ‘멍청이’로 규정한다.


<낙인(labeling)>
한 번의 실수가 일어나면 개인적 특성으로 규정해버리는 자동적 사고


‘나는 멍청이야!’라고 내 안의 내가 말할 때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이것은 팩트가 아니라 왜곡이라고. 단호하게 말해주자.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다 내가 해내야만 해.’

‘해야 할 것은 끝도 없어.’

‘피곤해, 그래도 안할 순 없어.’


성공과 실패가 각인된 사람들은 일상이 의무감으로 가득 차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일상은 쫒기는 느낌이 함께한다. 빨리 해야만 할 것은 늘 존재하고, 늘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그런 나는 늘 피곤하다. 너무 쉬고 싶다. 너무 자고 싶다. 그런데 너무 할 게 많다. 끝이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나 지친다.




‘실패’라는 도식(schema)은 가족 내 절대권력자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관련 있다. 절대권력자의 생각과 기대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 독립적 가치 생산을 방해받았을 수 있다. 내가 스스로 이 세상에서 나 자신에 대한 가치와 수행에 대한 기대수준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나대신 나의 수행능력의 기대치를 만들어버린 대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라는 정체성을 만들기도 이전의 나는, 스스로의 수행을 확인 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오롯이 절대권력자가 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잘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절대권력자가 못했다고 말하는 기대수준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실패’ 도식이 강화된 채 어른이 된 사람의 경우, 성취의 영역에서 셀프킬링하는 절대명제를 보유하며 살아간다.


‘나는 또 실패할거야.’

‘실패하지 않으려면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해.’

‘나는 별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


내가 수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이 그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계속 열심히 한다. 쫓기듯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단히 재앙적인 결과, 즉 실패가 나를 처벌할 테니. 그 처벌만은 피하고 싶다. 그래서 피곤해도 쉬고 싶어도 놀고 싶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진다.


절대권력자로부터 각인된 절대명제(실패하면 안 돼)는 능력만이 최고라는 성과사회가 낳은 결과물이다. 나에게 절대명제를 심어준 절대권력자 또한 사회로부터 피해를 입은 결과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 한병철 교수, 피로사회(2012)

2012년에도, 2020년에도 여전히 우리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고 믿는 사고패턴은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경험해보기도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안타깝지만 나는 무능하다는 생각도 어린 시절, 부모의 조건적 양육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자기가 뭘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탐구적 태도는 키워 질 겨를도 없이, 성공과 실패, 두 가지 옵션에서 평가 받고 처벌 받는다.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는 주입되기 시작한다. 철저히 부모의 기대치를 기준으로 무언가를 ‘잘 했다 vs. 못했다’로 판단된다. 그러면 아이로서는 내가 ‘잘 했구나. vs. 못 했구나’ 이렇게 성공과 실패의 도식 두 가지로 자기 자신의 수행을 판단하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부모의 기준에서 ‘잘 했을 때(성공)’ 뒤따라오는 보상은 참 달콤했을 것이고, ‘못 했을 때(실패)’ 이어지는 처벌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자신의 수행에 대한 감각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어린 아이의 마인드셋을 갖고 살아간다.


중요한 건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 때의 나는 무력했다. 그 땐 나에게 성공과 실패만을 각인시킨 절대권력자가 존재했으며, 나는 뭔지도 모르고 그런가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나에게 말해줄 수가 있다. 이 세상에 모든 수행에는 ‘성공’과 ‘실패’ 이렇게 무 자르듯 두 개로 나누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연속선상에서 조금 더 잘할 때가 있고, 조금 덜 잘할 때가 있는 것이지, 성공/실패 딱 두 개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그리고 사실 늘 잘할 수도 없고, 늘 잘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아무리 내가 나의 영혼을 갖다 바쳐서 노력 한다 해도 예측하지 못하는 변수는 늘 존재하며, 나의 수행도 기복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이번에 조금 수행이 저조했다면, 그 원인을 찾아 다음번에 다른 시도를 해보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내가 늘 모든 걸 완벽하게 잘 할 수가 있겠냐고.


그래서 설령 내가 어떤 일을 잘 못 해냈다 하더라도, 내가 무슨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실패자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그냥 실수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라고. 절대로 실수를 안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냐며. 그동안 내가 갖고 살아오던 절대명제, 내가 셀프킬링하던 절대명제에게 반박할 수 있는 내가 되면 참 좋겠다.




실패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일의 형태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 마음 상태에 따라 내가 편한 방식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마침 퇴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의 캐릭터들이 생각난다.


(1) 일할 때 의욕 없이 대충대충 되는대로 하는 유형


컨설턴트K씨: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 그냥 대충하지 뭐”


회사에 다닐 때 정말 이해가 안 갔던 사람이 있다. 나보다 2년 먼저 입사한, 나이와 연차는 나와 같은 동료였다.


나의 속마음: ‘어떻게 저렇게까지 일을 대충대충하지?’


그의 대충대충 일하기는 내가 입사하고 퇴사하는 2년의 시간 동안 화가 날 정도로 지속되었다. 대충대충 일하기를 참으로 성실하게 잘 하는 사람이었다. 프로젝트가 겹쳐서 돌아갈 때가 많은 회사여서, 프로젝트를 함께 꾸려가야 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것까지 다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일하기 싫어하는 그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난 그 사람이 정말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믿었다. 그런데 웬걸?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왜 겉으로 보이기에 ‘대충대충’ 일했을까? 그 마음이 궁금해서 술 한 잔 한 김에 물어봤다.


나: “K씨는 왜 그렇게 대충해요? 같이 일하는 사람 열 받게?”


컨설턴트K씨: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 잘 안 돼요‘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인데, 내가 입사하기 2년 전의 그는 무슨 일을 맡겨놓아도 믿음직스러울 만큼 자기 일을 완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개인이 PM(Project Manager)이라도 조직의 지원이 부족하면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그 회사의 구멍은 대표자 A씨였다. PM을 맡았던 컨설턴트K씨가 아무리 애를 써도, 대표자가 늘 구멍을 내고 사고를 쳤다. 그렇게 2년이 흐르자 컨설턴트K씨는 일에 손을 놓기로 했다. 대충대충 하기로 선택했다. 어차피 일은 다 잘못될 것이고, 그건 모두 A대표 탓이라는 말만 입에 달고 살만큼.


(2) 일적인 도전을 완전히 회피하는 유형


회사에 다닐 때 정말 이해가 안 갔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나의 속마음: 아무리 소기업이고, 창업멤버라 짤릴 위험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회사가 10년간 해온 사업콘텐츠에 대해 이렇게 무지할 수가 있지?


이 회사는 수주 베이스 프로젝트가 돌아가야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 있는 회사였다. 여기에는 늘 사고를 부르는 A대표와 더불어, 늘 한결같이 벽지처럼 존재하는 J씨가 있었다. 경영지원 담당 임원으로 자리하고 있었지만, 메인 아이템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없는 채 15년간 근무중이었다. 아직도 물음표다. J씨는 지금도 그 모습일까? 그의 속마음도 편하진 않았겠지.


(3)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여 많이 성취하려는 일중독자 유형


이건 나의 케이스이다. 첫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밤샘근무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무한한 자원인 줄 알았다. 회사 근처 5분 거리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그 회사를 다니는 2년 간 나의 오피스텔은 샤워장의 기능 외에 별 기능이 없었다. 회사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나의 오피스텔은 그저 옷 갈아입고 샤워하러 들어가는 곳으로만 쓰였다.


“밤을 새서라도 완벽해 해내야 해!”


몸은 피곤하고, 성과가 안 나면 괴로웠지만 나는 그렇게 일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 일하는 게 멋져보였다. 회사 내에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었다. 컨설턴트라면 당연히 이렇게 일해야 지. 그러다 번아웃과 우울이 오고, 권고사직으로 퇴사할 때 쯤 알게 되었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한 자원이구나


회사에서 일중독자로 일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끊임없이 나를 몰아붙인 결과로 많은 성취를 이뤄냈다. 그 성취가 주는 달콤함이 너무 좋아 중독될 만큼. 그리고 그 시간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렇게 달려서 얻은 대가가 무엇인 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의 번아웃이 암 덩어리가 될 정도로 나를 혹사한 대가를 혹독히 치렀기 때문에.


“일과 나를 분리하자.”

“일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자.”


이 말을 들어보면, 이면에는 ‘일하는 나’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일하기가 싫을 때도, 출근길에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도, 우리는 자신의 일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이왕이면 잘했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기도 하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건 그렇게 ‘일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게 ‘일하고 있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일과 나를 분리할 수 있을까? 일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부분인데.


중요한 건 나에게서 일을 분리하거나 떼어놓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건 일이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일 이외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없다면, 다시 말해 나의 에고(ego)가 약하다면 나는 일에 나를 던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외모가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다. 대상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라는 아이덴티티가 약하면 그 무엇이든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에 내가 줄곧 1등 자리를 지켜낸 사람이라면 나의 '잘해야 한다 신드롬'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직장에 가서도 늘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서열에 강박을 가진 채 40대, 50대가 될 수 있다. 1위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그 대가로 서열을 매길 수 있는 또 다른 절대권력자에게 굽신거리며 그 사람 눈에 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다가 보이는 것만 챙기는 나, 내면은 헛헛한 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1등이어야 하니까

이렇게 나는 최고이고, 최고여야만 한다는 강박이 나를 발목 잡을 테니까.

그래서 일찍부터 1등을 해본 적이 없다면 더 쉽다. '잘해야 한다' 신드롬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사실 내가 대단한 성공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남들에게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게 살기’가 목표이다. 그런데 그 평범이 도대체 달성 가능한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산다면 나는 늘 열등한 존재로 머물 것만 같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왜 이렇게 힘이 든단 말인가.


평범하고 싶다는 것도 결국 남들과 비슷해지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한 단계 더 들어가 보면 ‘비난 받고싶지 않아’ ‘평가는 두려워’ ‘내가 못하고 있다는 소리 듣기 싫어’가 아닐까? 타인의 비난이 두려운 마음은 당연하다. 중요한 건 우리는 비난을 들을 필요도, 누군가가 나에게 비난을 할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비난을 할까봐 그들의 기대수준에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내 인생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비난의 말을 던지는 사람은 나타난다. 그 사람이 비난을 하냐 마냐는 그 사람의 마음이며, 내가 미리미리 통제할 수도 대비할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 나에게 비난이 날아왔을 때, 그것이 비난이라고 인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비난이 날아왔다면, 그것은 비난이며, 나는 비난을 들으니 기분이 매우 불쾌하다고 말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나의 자유다. 매우 불쾌한 말은 다시 듣고 싶지 않다며, 추후 발생 가능한 비난을 미리 쳐내는 것도 내가 내 입으로 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내가 기분 나빴다는 건 팩트다. 그런 비난을 거부할 권리도 나에게 있다.


나는 실패작이라는 명제는 틀렸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잘 해야 해”라고 나 자신의 목소리가 말한다면,

심플하게 말해주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글: Chloe Lee

그림: pinterest, Mauricio Ri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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