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부딪쳐보면 별 것 아냐
2019년 5월 30일
오늘은 유럽 자동차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비넷(Vinette)'을 구매했다. 비넷이란 고속도로 통행권이다. 주로 동유럽 국가인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나라가 사용한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프랑스, 이탈리아, 크로아티아는 우리나라처럼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 톨게이트에 진입해 자신이 이용한 구간별로 통행료를 지급하는 방식이지만 비넷을 사용하는 국가들은 10일권, 한 달권, 일 년 권 등 기간이 정해진 비넷을 사면 그 기간 동안 고속도로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나라별로 각자의 비넷을 사용하기 때문에 해당 국가에 진입할 때마다 비넷을 사야 한다. 과거에는 차량 유리에 붙이는 스티커형식이 많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e-Vinette으로 결제를 하면 전산으로 자동등록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만약 비넷을 구매하지 않고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적발되면 비넷 금액에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에 달하는 벌금을 내야 한다. 비넷은 모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하는데, 대부분 국경을 넘자마자 처음 나오는 휴게소에서 구매한다.
크로아티아에서 헝가리로 가기 전날 밤 비넷에 대해 알아보았다. 알아볼수록 확신보다는 의문점이 많이 생겼다. 비넷을 사면 된다는 것 같은데 "국경검문소에서 살 수 있다는 건지, 그렇지 않다면 첫 휴게소가 나오기 전에 비넷 단속을 하면 어떻게 항변해야 하는지, 구매도 복잡하고 비용도 드는데 그냥 국도만 이용해서 목적지로 가야 하는지' 등 다양한 걱정들이 내 머릿속을 뒤덮었다. 심지어 헝가리는 자국 통화인 HUF(헝가리 포린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로밖에 없는 나는 호갱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국경 휴게소의 환전율은 시내보다 훨씬 안 좋기 때문이다)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자그레브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리자 헝가리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단한 여권검사 후 목적지인 발라톤호수까지는 한 시간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국경검문소를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내가 비넷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휴게소가 나오길 바라며 고속도로를 주행했지만, 생각보다 휴게소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휴게소를 찾으며 달리는 내내 비넷을 검사하는 카메라 혹은 단속원이 있을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몇km를 달리자 출구표시와 함께 Vinette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비넷표시가 된 안내판을 따라가 보았지만, 휴게소는 나오지 않고, 겨우겨우 찾아간 표지판 끝에는 식당이 하나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서 비넷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어보자 여기서 살 수 있단다. 가격은 3,500포린트.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본 가격과 같았다. 유로밖에 없는 내가 유로로 지급하겠다고 하자 정상적인 환율로 계산하면 11유로면 충분한 금액인데 14유로를 달란다. 속으로 '훗 내가 그럴 줄 알고 유로로 얼마인지 다 계산하고 왔다'라고 생각하며 카드로 결제했다. (크로아티아 ATM 출금 수수료 사건 이후 멍청비용을 줄이기 위한 나의 여행지 사전공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헝가리의 비넷은 전산 등록시스템이라 구매만 하면 끝이었다. 비넷을 구매하기 전까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걱정했지만 실상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시작하기 전에는 복잡해 보이고, 헷갈리는 것들이 막상 부딪치면 생각보다 간단하고 쉬운 문제임을 발견한다. 시작하기 전 과잉고민을 하며 낭비한 에너지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줄이고, 현실에서 직접 부딪혀 보는 것이 때로는 문제해결의 가장 간단한 솔루션일 수 있다. 모든 문제가 부딪친다고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많은 문제는 사실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