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진성리더십] 각성사건

진성리더십아카데미 20기

 나에게 각성사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버팀목으로 살았지만 철학공부를 하면서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자가 되었을 때였고, 하나는 박사과정 준비를 위한 여성주의 스터디 모임에서 마이너리티 감수성을 체감한 때다. 


 종교의 버팀목은 30년간 쌓아왔던 버릇이기도 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지만 교회를 빠지지 않았었고, 유년부 주일학교 교사를 10년간 했었다. 토요일 새벽까지 놀다가 급하게 교회를 가기도 했다. 고3 때 공부량이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 그리고 갑작스레 반 등수가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찾아간 소예배실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믿을 것이라고는 신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자주 예배당에 가셨다. 나는 불 꺼진 예배실 한 쪽 긴 의자에 등받이와 엉덩이 받이 중간의 틈사이로 보였던 어머니의 발바닥을 봤다. 상당한 충격이기도 했다. 그 기도로 턱걸이하듯이 대학을 갔다고 생각한다. 때론 어머니의 신앙이 부러워 나는 신에게 방언이나 기도의 은사를 주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도 많았다. 직장을 다니고 여전히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으며, 결혼 후에도 아내와 교회를 빠지지 않고 나갔다. 아내는 '일요일에만 나가서 회개하고, 달라지지도 않는데 뭐 하러 교회를 다니냐?'라고 물었다. 수단으로써 종교를 활용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행동 패턴을 바꾸는 것이 좋은데, 나는 꼭 교회를 가야 하는가 고민했다. 직장생활의 괴로움을 달래다 보니 책의 종류가 자기 계발서에서 철학책으로 넘어갔을 때, 철학과 신학의 논쟁, 기독교의 역사, 종교체험의 일상성 등에 대한 책을 보게 됐고, 특히 2010년 전후로 일었던 인문학 열풍에 철학자들의 강연을 자주 들었다. 일요일 오전 교회를 가지 않는 것이 어색했지만 견딜 만 해졌을 때 주말이면 도올 김용옥 선생 강의를 매일 봤는데, 신은 있을지 모르나, 현재 종교로써의 신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와 크리스트교 등 소위 인도-아리아어 계통의 종교는 어떤 세계에서나 생성된 종교에서 말하듯 현생 너머의 다른 생이 있음을 가정한다. 원시불교는 그렇지 않았지만 힌두교와 결합하게 되며 극락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그것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업(카르마)이라고 했다. 업을 극복하는 열반을 통해서 소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크리스트교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이는 현생의 죄에서 구원을 받아 생명책에 기록되는 방식으로써 이생을 가정하고 있다. 극락과 천국이 사라지면 현생만 남고, 고통과 죄도 모호해지며, 이생을 위한 구원과 열반도 의미가 없어진다. 잘 사는 것의 의미도 목적도 희미해졌다. 삶의 근본 목적의 상실은 자유이며 허무이기도 하다. 허무는 또 다른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런 목적의 상실은 그간 살아왔던 방식 전체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어머니의 발자국을 잊은 적은 없지만, 나는 어머니의 발자국을 위해서 살 수는 없었다. 


  자유와 허무라는 단어는 추상적이다. 삶은 여전히 구체적으로 이어진다. 그 각성뒤에도 언제나 찾아오는 말과 행동의 차이, 나를 자유롭지 않게 하는 수많은 허들이 있었다. 왜 더 자유롭지 못한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면 되지 않는가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정독도서관에서 들었던 특강이 있었는데,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교수님의 강의였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별과 인종의 차별로 너무나도 쉽게 구분당한다는 것이 첫 문장이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잠시 스쳐지나 것들은 있었다. 군대에서 무력하게 구타를 당하던 때, 해외여행 중에 백인과 흑인 앞에서 몸이 움츠러드는 것 등이 대표적이었다. 오랜 여행에서 유독 미국은 피곤했는데,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눈빛이 영 싫었다. 나는 소위 한국사회에서 밤거리가 무섭지 않게 다닐 수 있는 지위가 있었다.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그 권한은 사라진다. 


 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면접을 봤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전에 몇몇 지인들이 문화인류학과의 '젠더' 수업이 있을 텐데, 미리 준비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같이 글모임하는 분 중에 성희롱 성폭력 전문강사가 있었고, 내가 그간 자유롭지 못함에 대한 한탄을 했을 때 묵묵히 그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가 함께 스터디를 이어나갔고, 나는 학문적으로 이해하는데, 마음속으로 의문이 여전히 남아서 대학로 카페에 앉아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그런데 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성별격차도 이겨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아, 존재가 차별의 원인이 된다면 극복이 만만치 않죠. 많은 학문이 있지만, 억압에 대한 학문이 페미니즘이에요. 그 억압의 감정을 느끼는 게 가장 기반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몇 번의 대화가 반복되었는데, 스터디 동료들이 나에게 진심을 다하는 표정을 봤다. 논리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마음과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 그 점을 알려줬다. 퍽 복잡한 감정이 일었는데, 어떤 인간도 어떤 면에서 소수성이 있다는 점, 내가 어떤 것을 향한 자유가 하나의 억압일 수 있다는 점 등이 생각났다. 밤거리에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권한이 내가 자연스럽게 얻었지만, 인류의 절반은 그럴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됐다. 억압의 감정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물론 박사과정 수업 중에 조심스럽지 못한 단어 사용, 차별을 유예하는 표현들로 동료들이 불편해했었는데, 그 시간을 버텨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이러한 지식이 시선의 변화라는 몸까지 미치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는데, 그곳에서 충분히 마이너리티였던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만 편안한 감정을 느꼈던 동료들이 나를 동료로 조금이나마 생각해 줬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뻤다. 물론 그런 각성사건은 계기이기는 하나 실천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한낱 추억이며 나의 행동을 두둔하는 요인으로 활용될 수 있다. 아내는 나를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의 책에서 말한 '비정립된 인간'이라고 했는데, 알긴 알았는데 행동으로 다시 정립되지 않았다고 한다. 


 각성사건, 자유와 허무라는 생각 자체가 힘이었다는 점, 그것을 부정당하는 존재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허무 속에서 자유를 제대로 느끼고 발걸음을 옮기는 방식이라고 다짐한다. 여전히 딸아이들은 울고 있고 나는 글을 쓰다가 애들이 왜 우는지 짜증이 일어났다. 비정립은 상존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