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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리더십]달리 걷는 걸음, 함께 느끼기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20기

 20년 전 내가 어떤 시간을 걷고 있을지 알지 못했다. 지금 흘러가는 속도와 농도가 다른 시간에 있다. 여전히 어디에 있는 게 나은건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먹고살기 위해서 혹은 그 너머 어딘가를 위해서는 진자의 최고점이 가장 속도가 느리고 최저점이 가장 속도가 빠른 것처럼 유동하며 고의적으로 대응적으로 살지 않을까 싶다. 시간을 달리 걷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20년 동안 흘러왔던 곳의 감각은 상당히 달랐는데, 진성리더십에서 바라보는 진북으로써 사명과 진남으로써 긍휼을 기반으로 하려면 게다가 누군가와 긍휼감을 함께 느끼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과 시간을 함께 걷고 느끼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근대이전의 개별 특성을 가졌던 사회에서는 진성리더십의 정신모형 I에 해당하는 미숙련과 정신모형 II에 해당하는 성년으로만 나눌 수 있겠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듯 근대적 기술의 방식이 개인을 닦달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정신모형 II가 드러나지 않고, 다시금 정신모형 I으로 회귀하고 만다. 지속되는 미숙련 혹은 성찰 없음을 통한 근대적 가치의 추종은 정신모형 I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 각성사건을 통해서 정신모형 II로 변화하고 사명을 함께 이루는 사회를 재정립은 필요하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소위 통과의례를 통해 문지방 단계(liminal Phase)와 코뮤니타스(Communitas)로 구분했다. 다양한 통과의례를 거치게 되면 그/녀는 전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일들과 시간대에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진성리더십에서도 착안하듯이, 근대화 혹은 신자유주의 형태로써 사회생활의 통과의례를 다시금 역-통과의례를 하며 아나키즘적 코뮤니타스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부족하나마 비즈니스 세계와 학술세계 그리고 시의 세계를 여전히 횡단하며 살아가는 나의 감각을 기반으로 한다. 


 10년간 직장생활은 비즈니스 세계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시간은 내가 목격했던 세계 중에서 가장 빨랐는데, 10초만 말하다가 논점이 흩어지면 결론이 뭔지 물어보는 이들과 두괄식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이들, 나도 동일한 시간으로 속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속도가 빠르지만 상당폭 농도를 제거하기 바빴다. 타인의 일상에 개입하는 것은 통상의 노동윤리와 사회적 통념에 기초했다. 지금은 조금 저어 되긴 하나, 결혼은 자녀는 집은 부동산은 주식은이라는 질문은 직장생활에서 너무나도 쉽게 통용되는 방식이다. 조직의 구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직적 조직에서는 언제나 결론을 묻고, 뛰어난 조력자는 리더의 '시간'을 줄여주는 사람이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 마음 씀이 어색한 공간이 비즈니스 세계 아니었던가? 그래서 요즘에는 관계를 맺기보다는 거리를 두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서로의 사명을 존중한다는 의지는 유효하나, 사명 자체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동시에 직장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냉정하겠지만 먹고는 살 수 있다.  


 내가 경험한 학술세계는 따뜻하나 결국에는 냉정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학술세계는 연구자들의 집단으로써 대부분 수평적이나 명확한 위계질서가 있다. 게다가 좁디좁은 귀중한 자리와 그곳에서 알아주는 논문실적이라는 방식, 그리고 먹고 살기라는 곤궁함이 언제나 함께하는 자리이다. 연구자들에 대한 예의는 있으나 자본과 여유가 충분치 않은 곳이기 때문에 연구하는 것에 파묻힘이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있으나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학술세계가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세계보다 더욱 냉철한 위계 혹은 자격 기준은 의외의 감각으로 다가왔다. 어떠한 순간과 선택 하나로 오랫동안 겪어왔던 세계의 시간을 망각당할 수도 있다는 점은 참으로 불안을 작용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곳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드물게 먹고사는 일이나 명예로운 시간은 올 수도 있겠다.   


 시의 세계는 따뜻하기만 한 곳이다. 시를 쓰고 읽다 보면 사람을 만나고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불투명한 삶과 하루하루를 그나마의 투명한 언어로 만들기 위해 벼리는 시의 방식은 한순간을 영원처럼 만들고, 오랜 고통을 눈 한번 깜빡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 시인 선생님들이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은 느리고 깊었다. 시라는 작품이 가진 냉정함은 취미생활이 아닌 프로의 글쓰기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 시인의 세계라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때로는 따스함과 고향 같음과 쉽게 접근하지도 않지만, 다가왔을 때 선뜻 자기의 자리마저 내주는 삶의 방식은 때론, 시인이 되는 것보다는 시인으로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시인, 시간을 늘리고 줄이지만, 그 주인공을 사람에게 둔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시로, 먹고사는 일은 오래도록 생각해보지 않은 시간 아니던가. 그래도 삶은 조금 비루하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진성리더십은 어떤 세계를 소망하면서 현시대의 정신모형 I을 정신모형 II로 이끌고 그 안의 공동체를 때론 시적으로, 때론 학술적으로 때론 비즈니스적으로 농도를 조절할 수 있을까? 물론 어디에서나 권력의 작용은 상존한다. 대기업처럼 복잡한 조직이 위계적이라도 생각하겠지만, 스타트업만큼 사장 마음대로인 곳이 없다. 시간을 모두 내주어야 하는 순간은 때론 권력과 거리가 멀수록 가능할 수 있다. 그 생살여탈권에 대한 감각은 사명과 긍휼에 대한 의식과 감각을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저 공동체를 이룬 상처받은 각성의 사람들은 서로의 시간을 함께 걷고 부둥켜안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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