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진성리더십] 진성리더십의 실천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20기

 이제 실천에 대해서 말한다. 진성리더십은 큰 틀에서 정신모형 I과 정신모형 II에 대해 구분한다. 도식적이기는 하나, 정신모형 I이 과거의 모습, 무비판적 가치관이라고 한다면, 정신모형 II는 미래의 사명, 기존의 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이다. 이는 학문적으로 봤을 때는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마르크스 철학을 확대 해석했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나오는 개념과 유사하다. 자유는 두 가지인데 '~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이다. 이는 그간 억압, 소외를 했던 것으로부터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과 이후에 사회에서 말하는 통상적인 소유, 재산이 아닌 존재 자체를 향한 자유의 방식이다. 물론 철학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존재와 관계에 대한 끝없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정신모형 I에서 각성을 통해 정신모형 II로 이동하는 일은 철학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 여정일 수밖에 없다. 정신모형 II의 자각이 곧 실천으로 이뤄지기도 어려우며, 이러한 실천은 그날의 정신모형 I이 되어서 다시금 II를 향해 도약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루는 반복되지만 하루도 같은 시간은 없듯이, 개인에게 각성을 통한 도약은 미래를 바라보는 인간에게 내려진 멍에와 같은 날개이기도 하다.


 이것이 조직으로 펼쳐진다면 그 문제는 더욱 만만한 일이 아니게 된다. 진성리더십 책에서 제시하듯이, 진성리더가 아니라 진성리더십인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한 조직의 사명은 조직 리더만의 사명이 되어서는 정신모형 I의 형태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조직원들과 떨어진 정신모형 II는 조직원들에게 타인의 가치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직이 정신모형 II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의 각성 혹은 각성이전의 공감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감의 원천 혹은 동인은 진성리더십에서 강조하는 진북과 진남의 연결고리에 달려있다. 


 이것의 철학적 개념을 좀 더 찾아봐야 하긴 하는데, 진성리더십의 논리를 따라가 본다. 진북이 사명이라면 진남은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감정적 동력으로써 결국에 긍휼(compassion)로 제시된다. 긍휼은 동정, 공감보다 확장된 개념이다. 동정은 sympathy의 우리말로써, 나를 벗어난 타인의 사건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더 강하다. 조금 확장된 것이 공감으로써 empathy이다. 파토스(pathos)가 마음으로 들어오는 형태이다.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상태이다. 더 확장한 것이 긍휼(compassion)로써, 이는 고통(pass)을 함께함(com)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는 그렇게 상관이 없는 사람에 대한 공감현상으로써, 삶에서 가져야 할 연민의 마음이다. 진남은 바로 긍휼감을 기반으로 하며, 그래야 진북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진성리더십의 원리이다. 


조직에서 긍휼감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사명이 조직원 마음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과 유사하다. 자발성이 기대지 않은 일과는 효율성과 효과성도 발휘하기 어렵다. 리더는 확고한 사명을 통한 비전을 수립하고 그것이 조직원의 동의는 물론 감정까지 함께 일어야 한다. 그런 감정은 어떻게 일 수 있을까? 리더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텐데, 이는 자신이 먼저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각성 사건과 경험만을 간증식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명을 위한 솔선수범 및 헌신하는 방식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긍휼감과 각성사건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모든 조직원이 만족한다는 것은 그것 또한 모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일터와 조직이 무엇을 위한 공간인가라는 여전한 의문도 들게 한다. 사명과 일치하지 않는 일은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빛나는 일, 빛나지 않은 일에 대한 배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과 간격을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는가? 긍휼감은 기다림의 방식으로만 가능한가? 조직원의 각성사건은 어떠한 형태로 유도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의 모습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기능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을 욕할 수만은 없다. 이들을 설득하는 방식은 어떠한 현실적 방법이 있는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관점을 응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혹은 사회적 논의도 확대해야 한다. 그간 위계를 기반으로 회사의 성과가 곧 나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발전의 동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그 성과를 배분하는 기간을 점점 축소하는 현실적 접근이 우세한 지금, 발전의 열매가 만만하게 순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된 지금, 기존의 리더십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이면서도 성과를 단기적으로도 지속적으로도 달성해야 하는 지금, 어떠한 형태의 개선이 필요한가? 한국사회 재벌이나 그룹조직은 책임을 지는 일부 월급쟁이 리더를 제외하고 상당수 권한만 있고 책임을 지지 않는 조직이 옥상옥 구조처럼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단위 회사를 넘어서서 산업계 전체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책임을 강조하고 권한을 줄이거나, 권한을 나누거나 설득하는 방식이 아닌 상황에서 무엇부터 차근차근 바꾸어볼 수 있는가?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현 상황을 나무라며 전면부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는가? 


 진성리더십의 토양을 그나마 넓히기 위해서는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겠지만, 동의를 얻는 방식은 어떤 면에서의 세밀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많이 궁금하다. 에리히 프롬의 저술이 그때당시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이유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마저 없는 수많은 이들이 자유의 박탈을 당하고 있는데, 고상한 일은 아니었는지, 그것 또한 백인남성중심의 사고는 아니었는지 묻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도달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혹 이 질문마저 '내가' 먼저 행동하지 않고 주저하고 걱정하고 있는 정신모형 I에서 II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던가?




 



 


 





이전 05화 [진성리더십] 디커플링 - 언행불일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