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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땅 Apr 24. 2021

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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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와서 보니 프로그램 및 운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캄보디아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환경 및 에너지 부문(Environment and Energy Unit)에도 3명의 캄보디아인 정책분석가(Policy Analysts)와 일본인 JPO가 일하고 있는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이건 뭐지?'란 생각이 들었다. 국제기구를 꿈꾸며 아무 생각 없이 선진국에서 온 서구 사람들과 유창한 영어로 개도국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만 상상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2012년. 처음 개발협력 분야에 발을 들이고 4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때만 해도 한국의 여러 분야 전문가들을 대동하고 현지에 가서 한국의 발전되고 선진화된 정책/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 생각을 가지곤 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입장이 바뀌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입으로는 파트너 국가의 주인의식(Owner)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정작 내 안에는 이런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나라 국민이고, 특히 개도국과 같이 사업 수행을 위한 상황이 열악한 곳에선 외부자보단 그 나라 국민이 주체가 되어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현지 슈퍼바이저(Supervisor)와의 오후 미팅에서도 이런 언급이 있었다. UNDP가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간 캄보디아 현지 직원들의 역량이 많이 신장되어 지금과 같은 구조가 되었다고. 이 말을 들으며 난 내 자신이 참 부끄러웠고, 그러면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의 나라에 1-2명의 정직원을 파견해 놓고는 소장, 부소장이라 부르고, 몇 명 되지도 않는 현지 직원들은 대부분 이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게 하는... 여기도 소수의 리더들은 P, D 직급의 외국인(international staffs)이긴 하지만 업무의 책임이나 권한에 있어 분명 차이가 있는 듯하다.


아직 많은 걸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여기 직원들한테 참 배울 게 많다. 다들 전문가답고, 말할 때 자신감이 넘친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오만함을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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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주일간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고 먼 거리는 뚝뚝이나 미터 택시(초이스)를 주로 이용해 왔는데 아무래도 자전거가 있으면 이동도 편리하고 주변 지리에도 빨리 익숙해질 것 같아, 주말 동안 이곳의 동대문시장 격인 오르세 마켓에서 중고 자전거를 한대 장만했다.


이온몰(프놈펜에 새로 생긴 일본계 대형 쇼핑몰)에만 가도 새 자전거를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새 자전거는 도둑맞을 염려도 있고 나에겐 그렇게 좋은 자전거가 필요하지 않아 인터넷 검색 끝에 오르세 시장을 찾았는데... 뙤약볕 아래서 중고자전거 상점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어찌나 사람도 많고 복잡한지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여기저기 한참을 헤매고 다닌 후에야 한 골목에 줄룩이 늘어선 자전거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 물어본 자전거의 가격은 25불, 다음번 물어본 자전거(조금 더 깔끔하고 앞에 바구니가 달린)가 45불이었는데 안 되는 크메르어로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가격을 깎는 데는 실패했지만 외국인이라고 덤터기 씌우진 않을 거라 믿고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 자물쇠를 하나 서비스로 얻는데 만족하고서는 45불을 지불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거리의 쇼핑엔 바구니가 필요할 테니!


하지만 고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몰고 돌아오는 길엔 동서남북에 대한 감각이 없고 주변의 지형지물이 친숙하지 않은 탓에 한 장소를 계속 돌거나 호텔과 반대방향으로 달리기도 했다. 게다가 뭔가 질서가 없는 도로 위에서 오토바이의 위협을 느끼며 같이 달리다 보니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제 길을 찾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전거를 구입하고 어제, 오늘 이곳저곳 다녀보니 사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든다. 


참, 이온몰에 가니 자전거도 오토바이와 같이 주차 티켓(1,000리엘 / 2~300원)을 받아 지정된 공간에 주차한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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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도착한 지 11일 만에 앞으로 살게 될 집도 구했다.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이메일로 예약해 둔 현지 부동산 업체를 통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프놈펜의 중심지, BKK1(현지어로 벙깽꽁이라 부르며, 외국 대사관과 여러 UN기관,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있다.)이라고 흔히들 부르는 이 곳의 월세는 역시나 장난이 아니었다.


한국의 원룸보다 조금 큰 스튜디오 아파트(Serviced Apartment)가 월 800불, 방이 2개면 12-300불이 넘어간다.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준다지만, 평소 지출 대상에 없던 월세를 80만 원 가까이 내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부담이다. 거기다 UN으로부터 받는 수당(월 2천 불 정도)도 충분치 않다. 


사실 BKK1을 조금만 벗어나도 헬스장과 수영장이 갖춰진 새로 지은 아파트가 6-700불이면 가능하고 더 저렴한 아파트도 많이 있지만, 한국에서 왕복 3시간 걸리는 거리를 통근하며 고생했던 기억과 혹시나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가능하면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서 집을 구하고 싶었다.


수영장/헬스장/엘리베이터도 없고, 빨래/청소 등의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지만 가격은 월 750불. 조금은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인데 방이 넓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라 햇살이 좋으면서도 덥지 않았다. 회사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5분. 정 맘에 안 들거나 문제가 생기면 옮길 수 있도록 6개월만 계약했다. 도착하고선 창문도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는데, 발코니를 통해 비치는 밝은 햇살을 받으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참고로 UNV로 임지에 도착하게 되면 숙소를 마음대로 계약할 수가 없다. UN보안국(UNDSS) 관계자의 거주지 안전 검사(residential Inspection)를 거쳐야 하고, OK 사인이 나야 계약을 진행할 수 있다(의무사항). 


첫 번째 검사는 거주 불가. UN보안국에서 나온 현지 직원은 문에 작은 관찰용 구멍 설치, 각 방에 연기탐지기 설치, 소화기 구비, 정문 및 발코니 문 자물쇠 추가 등이 해결되어야 허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행히 집주인과 이야기가 잘돼 추가 비용 없이 무료로 설치해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정착지원비(Setting-In Grant)는 언제 나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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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처음 맡게 된 업무(assignment)는 바로 'LPG 시장 및 가구 내 조리법 조사(LPG market and household cooking assessment).'


이 프로젝트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몇 년 전부터 글로벌 이니셔티브로 추진 중인 'Sustainable Energy for All (SE4ALL:  모두를 위한 지속가능한 에너지)'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캄보디아 인구의 90% 정도가 조리 시 장작(firewood)이나 숯(charcoal) 등의 고체연료(solid fuels)를 이용한 난로(cooking stove)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연기(household or in-house air pollution)로 인해 이들 가족 구성원, 특히 전통적으로 조리를 담당하는 여성과 아이들 건강이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조리용 난로는 벽돌 세 개를 삼각형이나 'ㄷ'자 모양으로 놓고 그 위에 냄비를 얹고 나무를 태워 요리하는 방식부터 연기 발생을 최소화하며 열효율을 높인 개량형까지 다양한 종류가 존재한다.


그간 이런 상황의 개선을 위해 개량형 난로의 보급(세계은행이나 GERES 등) 등 여러 사업이 추진되었고 프놈펜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미 LPG 사용률이 50%를 넘어서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인구가 기존 혹은 전통적 방식으로 조리를 함에 따라 산림 황폐화와 토양유실, 가정 내 연기 오염으로 인한 건강 위협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UNDP에서는 캄보디아 LPG 시장의 현 상황(정책, 시장, 수요, 공급 등)과 가정 내 조리법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통해 향후 캄보디아 내에서 LPG와 같은 깨끗한 연료의 사용을 촉진할 프로그램을 개발코자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한 기초조사(basic study)는 이미 내가 도착하기 전에 완료돼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과업지시서(Terms of Reference)를 작성하고, UNDP를 대신해 동 조사를 진행할 컨설팅회사나 단체를 선정하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흐름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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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P 사무소에서는 요즘 조직구조 개편이 화제다.

 

신기한 건 지난해부터 조직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올 7월에 있었던 직원 연찬회(retreat)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UN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이 그만큼 느리다는 건가? 


암튼 시간을 끈 만큼 조직구조 개편의 영향을 받게 될 많은 직원(절대 다수의 캄보디아 직원들)들이 염려의 눈길을 보내며 걱정(인력감축도 포함돼 있다)하고 있는 듯한데, 드디어 그 개편(안)이 지난 월요일에 있은 월례회의에서 공개되었다.


조직구조 개편의 주목적은 UNDP가 그간 너무 'UNDP' 독단적으로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향후에는 'UN'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업을 진행해야 하며, 프로그램/프로젝트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조직구조를 프로그램 사이클에 맞춰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의 여진(aftershock)으로 여러 국제기구들이 재정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로 인해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이 본부에 이어 이제 국가사무소에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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