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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2. 2023

쫄면 80그릇을 먹으면 생기는 일

대체로 불안해서

0시 30분, 1시 20분, 2시 40분, 4시 10분. 밤 11시 무렵 스르륵 잠들었던 지난밤 내가 깨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한 시간이다. 다음날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뱅글뱅글 돌리다 4시 45분,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5시 30분에 집을 나서야 계획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서둘러 씻고, 밥 두어 숟가락 입에 욱여넣은 후 양치질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새벽길을 나섰다. 물에 젖은 빨래처럼 무거운 몸을 꾸역꾸역 이끌고 전철에 올라탄다. 자리에 앉자마자 쇼핑몰 앱을 열었다. 그리고 검색창에 이 단어를 쳐서 넣었다.     


마그네슘     


숙면에 도움을 준다는 마그네슘 영양제 3개월치를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결제했다. ‘내일 도착 보장’을 알리는 선명한 마크가 결제의 결정적 이유였다. 하루라도 빨리 받고 받아 잠을 푹 자고 싶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잠이다. 그냥 잠도 아니고 콕 짚어 숙면. 잠자리에 누워 있는 시간은 분명 적지 않은데 수면의 질은 떨어진다. 과연 마그네슘을 먹으면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었던 선배 구매자들의 후기를 믿기로 했다. 내일이면 마그네슘은 도착할 테고, 어느 정도 먹으면 마그네슘이 내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잠을 푹 못 자는 이유는 대체로 불안해서다. 어제 불안했던 이유는 제때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 그 마음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수없이 시계를 확인하게 만든다. 새로운 일은 손에 익지 않아서 불안하고, 하던 일은 과신하다 삐끗할까 봐 불안하다. 준비하고 준비해도 개운한 기분은 없다. 돌아서면 뭔가 빠진 게 있지 않을까? 더 챙겨야 하는 건 없을까? 마음이 편치 않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좀 늦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기어이 시간을 맞춰야 그제야 은은하게 마음이 놓인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결과는 고스란히 몸에 나타난다. 입안에 두더지 게임이라도 벌이는지 구내염과 혓바늘이 약이라도 올리는 듯 솟았다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오른쪽 코 밑과 왼쪽 입가에 돋은 딴딴한 뾰루지도 장기 거주 중이다. 눈은 퀭하고, 탄력 없는 피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볼품없다. 언제 어디서 생긴 지 기억도 안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찢긴 상처는 일주일이 넘어도 아물지 않고 진물이 흐른다. 아 이게 영혼과 손가락이 동시에 흘리는 눈물인가?


난 불안을 쫄면 그릇 개수로 가늠한다. '쫄린다‘는 단어를 활용한 절친한 후배와 주고받는 우리의 표현법이다. 쫄면 그릇 개수는 ’쫄림’의 강도를 의미한다. 보통은 ‘오늘 결과 발표 날 때, 쫄면 100그릇 먹었어’, ‘이 사건은 쫄면 87그릇 감이야’ 이런 식으로 말한다. 평소에도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51그릇 정도 쫄면을 먹은 상태로 산다. 그런데 요즘 먹는 쫄면은 80그릇 이상이다. 쫄면 과식으로 항상 속이 더부룩하다. 체한 듯 머리는 무겁고 속은 답답하다. 입에 들어가면 별 힘을 주지 않아도 스르륵 위장으로 내려가는 죽이나 수프와 달리 쫄면은 씹고 또 씹어도 쉽게 소화되지 않고 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시뻘건 불안이 가득한 쫄면들을 소화하려고 걷고 또 걷는다. 이제 막 봄꽃이 돋아나는 산책로도 걷고, 겨울 흔적이 아직 남은 산길도 오르고, 봄 신상품들이 유혹하는 번화가도 거닌다. 눈을 홀리는 ‘새삥’에 잠시 정신이 팔리면 불안도 순간 지워진다. 그렇게 일부러 거리를 두고, 신경을 끄려고 노력 중이다. 불안에 잡아 먹힐 거 같은 기분이라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발버둥이다.


걷고 또 걸으면 몸이 피곤해 잠이 깊이 들어야 정상인데 그러질 못한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도 잔뜩 날이 서서 예민을 떨고, 작은 소리에도 개복치처럼 놀라 뒤로 나자빠진다. 사사건건이 이러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스마트폰 시계 알람도, 부재중 전화도, 메신저나 메일의 알림도 울리지 않는 망망대해 한가운데나 오지로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용기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하나하나 해결하기로 한다. 일단 약의 힘에 기대 본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택배 기사님을 기다린다. 내일이면 택배 기사님 품에 안겨 도착할 마그네슘은 내게 숙면의 축복을 내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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