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발가벗겨진 것 같았던 그때의 기억
1년 전 내가 정했던 퇴사일이다. 두 번째 직장에서 8년째 전략기획 매니저로 일하고 있던 나는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퇴사를 확정했다. 커리어의 모토가 '성장'이었기에 당시 회사에서 성장이 멈췄다는 확신을 갖고는 무모한 결정을 했다.
퇴사일 한 달 전부터 퇴사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회사를 떠날 날짜가 정해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니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내게 밀려들었다. 내 심장은 그 감정들을 감당하지 못해 가끔은 긴 호흡을 내쉬어야 했다.
후~~ 하~~
외국계 회사를 다니며 이직 준비할 때 나는 '현직 외국계 전략기획 매니저'에 신사업, 컨설팅 경험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퇴사 날짜를 정하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현실이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퇴사 전까지 원하는 곳에서 최종 오퍼를 받지 못한다면, 퇴직 후 나는 시장에서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을까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명함은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직장인에게는 오히려 주민등록증보다 더 자신을 나타내는 신분증과도 같은 것이 바로 명함이다. 당시 내 명함에는 S사, 전략기획, 직급, 부서가 차례로 적혀 있고 오른쪽 위에 회사 로고가 찍혀 있었다.
나는 명함에서 회사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하나씩 지워갔다. 회사 이름, 로고, 부서, 직급, 주소, 전화번호... 하나씩 지워져 나가자 마지막에 남은 것은 딱 하나, 내 이름뿐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회사를 배제하고 나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내가 회사 대표라면 나에게 어느 정도의 연봉을 주고 싶을까?', '내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인 거지?' 나는...
발가벗겨진 것처럼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런 기분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이력서를 들여다보니 내가 나름 주요 경력이라고 적어놓은 것 중에 절반 정도만이 내가 회사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예로, 신사업을 도입하고 안착시켰던 프로젝트는 내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회사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반대로 정부 정책이 시장과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와 분석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만으로는 나는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의 경우는 퇴사를 미리 결정했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안정을 찾은 지금도 가끔 회사를 제외한 나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진짜 가치라고 믿고, 그 가치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가치에 회사를 포함해도 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이직 의사가 있든 없든 한 번쯤은 내 명함에서 회사를 제외한 나의 모습을 나의 가치로 인식해보길 권한다. 그 경험 자체만으로도 자기 발견에 큰 도움이 된다. 후배들에게 조언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우리는 회사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대단한 것 같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회사가 대단한 경우가 훨씬 많다.
자신이 데이터 분석 컨설팅을 해주는 분석 컨설턴트라고 가정해보자. 스스로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내 프로젝트 고객은 우리 회사의 이름을 보고 계약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계약한 것일까?' 대개는 전자인 경우가 많다. 내가 아니어도 회사의 다른 컨설턴트하고 일을 해도 무관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보여지는 내 모습은 회사라는 '버프'를 받아서 쉽게 부풀려진다. 실제 내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경우에도 회사의 브랜드, 조직, 인적 물적 자원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본인이 '하드 캐리'해서 북 치고 장고치고 하는 경우는 정말로 흔치 않다.
얼마 전 20대 후반인 후배와 저녁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해줬다. 회사 빼고 본인만 봤을 때 자신의 가치가 어떠한지 살펴보라고 말이다. 후배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정신이 번쩍 드네요!' 세대마다 다를 수 있지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던 그 날 후로 내 브랜드에 조금씩 신경을 쓰고 있다. 나를 멋있게 브랜딩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영역을 찾고 다지고 있다는 의미다. 하나 예를 들면, 재능 기부로 강의를 할 때가 있는데 이전에는 내 콘텐츠보다 다른 사람의 콘텐츠의 비중이 훨씬 컸다. 물론 출처를 밝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검색하면 누구나 찾아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보여주는 것이 내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 콘텐츠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내가 전문가로서 실제 경험했던 일들, 이론이 현실에 반영되는 모습들, 그리고 나의 기준으로 정립한 이론들을 말이다. 재미있게도 강의 후 피드백을 살펴보면 내 콘텐츠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들이 많다. 회사 버프는 잘 사용해야겠지만 회사와 헤어져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나를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