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너를 위하여 [2부 4월 4일]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오후부터 비가 온단다. 우산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들고 밖을 나섰다. 문구점에 들러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우비를 샀다. 얼마 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우제를 지내고 난 사람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교 시간에 맞춰 마중을 갔다. 저 멀리 친구들과 어울려 나오는 사랑이. 큰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외쳤다.
「사랑아!」
나를 찾은 녀석의 표정이 기쁨으로 빛난다.
「아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사랑이. 젖는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빗줄기를 가르며 쏜살같이 뛰어온다. 서둘러 아이에게 우비를 입히고 우산을 씌웠다. 무엇이 그리 좋아서 잠시도 못 참았을까. 손수건을 꺼내 녀석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방실거리는 아이의 무구한 웃음. 지극히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킨 것뿐인데.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잊고 지내던 사람이 생각났다.
아버지. 나의 새아버지, 기태 아저씨.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별안간 나는 혼자가 되었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 무보증 고시원에 들어가야 했다. 관처럼 춥고 좁은 공간에서 지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 편이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기태 아저씨는 내가 머물던 고시원의 관리인이었다. 방세를 내는 대신 건물 여기저기를 살폈다. 현관에 앉아 푸근한 미소와 함께 살가운 인사를 건네도, 생활고에 지쳐있던 나는 한 번도 호응한 적이 없었다. 무시한 채 내 방으로 숨기에 바빴다.
본인도 지원을 받아야 하는 궁핍한 형편이면서, 제공되는 밥과 김치로 허기를 때우던 나에게 다가와 참치캔이나 삶은 계란 따위를 조용히 두고 갔다. 나는 그 친절을 값싼 동정쯤으로 치부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서 고등학생들과 담배 판매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 일단락은 되었으나, 끝이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나를 따라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끌고 갔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행인 몇몇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삐삑-
호루라기를 불며 기태 아저씨가 달려왔다. 손에는 집 앞을 쓸던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이놈들!」
아저씨의 호통과 호루라기 소리가 한데 엉켜 쩌렁쩌렁 골목 안에 울려 퍼지니, 이곳저곳 창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때리던 녀석들은 공개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아저씨의 부축을 받으며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따뜻한 코코아를 내 앞에 놓아주어도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밀려오는 설움을 꾸역꾸역 삼켜낼 뿐. 아저씨는 굵은 손으로 나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아들이 있었어. 늘그막에 얻은 외동이라 애지중지 키웠지. 그런데 몹쓸 병에 걸려 먼저 가버렸지 뭐야. 속상한 마음에 술병만 붙들다가, 몸도 망가지고 처도 떠났어. 이렇게 못난 아비라니. 저승에 가서 아들을 어찌 볼까 싶어. 살아있으면 딱 자네만 할 텐데… 그래서인지 핏기 없는 얼굴이 자꾸 신경 쓰였네.」
서글서글 웃기만 하던 아저씨의 뜨거운 눈물은, 빙하같이 단단히 얼어있던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녹여 무너뜨렸다.
이후로 아저씨와 나는 함께 저녁을 들었다. 반찬은 여전히 조촐했지만, 여느 가족들처럼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따스한 시간을 가졌다.
겨울이 무르익고 나의 생일이 다가오자 아저씨는 먹고 싶은 것이 없느냐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김밥이요. 김밥이 먹고 싶어요.」
듣자마자 아저씨는 역정을 냈다.
「고작 김밥이니! 돈 걱정 말고 뭐든 말해도 된다.」
「소풍 갈 때면, 두 볼이 빵빵해지도록 엄마가 싸준 김밥을 오물거리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아저씨는 뭣이 어렵냐며, 생일상에 미역국과 직접 싼 김밥을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생일을 하루 앞둔 저녁, 평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기태 아저씨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고 했다.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저씨는 머리끝까지 흰 천을 덮고 누워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그렇게 나는 도둑을 맞은 것처럼 새로 만난 아버지마저 서둘러 보내야 했다.
발인을 마치고 돌아와 아저씨 방에 들렀다. 유품을 정리할 겸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별것 없이 초라한 칸칸에는 불린 미역 한 바가지와 손질해 놓은 김밥 재료가 들어 있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친자식이 아니었기에 객처럼 장례식장을 서성여야 했던 나는,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소중한 이의 부재를 실감하며 느끼는 슬픔이 아니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구나. 나 역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었구나’라며 깨달은, 제때 전하지 못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아저씨가 지켜준 위태로운 청년은 어느덧 중년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 저보다 어리고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대가 빌려준 날개옷 덕분입니다. 다시 만날 당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아프지 않기를, 평안하시기를.
어느덧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무지개 아래서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케이크를 먹는 사랑이. 훗날에 너도 이 시간을 기억할까.
「사랑아, 곧 네 동생이 태어난대.」
「진짜요? 여자예요, 남자예요?」
「사랑이랑 똑같아.」
「헤헤. 많이 많이 예뻐해 줄게요.」
「고맙다. 우리 사랑이.」
image_©Arkhip Kuindz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