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너를 위하여 [2부 4월 4일]
살면서 가족과 명절을 보낸 것은 아내와 함께한 이태뿐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없던 나는, 비슷한 처지의 지인들과 연휴를 보내거나, 명절에도 구태여 일을 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뒤이어 추석이 찾아왔다. 당시 처가의 풍경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커다란 교자상을 모두 펼쳐도 앉을 자리가 모자랄 만큼 많은 식구들이, 어우렁더우렁 한데 모여 웃고 떠들던 모습. 연출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완벽할까. 현실에서 이상을 느꼈다.
이혼을 하고 처음으로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어려운 자리였으나, 투병 중인 장인어른의 청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 함께 느지막이 도착한 처가에는 일가친척들이 모여 생신 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명딸 고롭게 한 못난 사람임에도 반겨주시는 어른들께 큰절을 올리고,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꼬마 아가씨가 식사 시간을 알린다. 어른 상으로 가기에는 지은 죄가 많아, 못 본 사이 숙녀가 된 조카 곁에 앉았다. 조용히 수저를 드는데… 힘 좋은 셋째 형님에게 끌려가 겸상을 당했다. 의례처럼 반주가 돌고 연거푸 잔을 받았다.
「오빠, 그 사람 술 주지 마.」
멀리서 아내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불콰해진 형님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이 붙어 반주는 벌주가 되었다. 맥주 한 잔이 고작인 주량, 버틸 재간이 없어 사양을 하니 큰형님의 목소리가 한층 커진다. 남자가 되어 이뿐이냐며, 아예 잔을 바꿔 물컵에 술을 따른다. 흥겨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술을 삼키는데, 아내가 컵을 낚아채갔다. 나를 일으키고는,
「못 마시는 거 알면서, 다들 왜 그래.」
화가 난 아내는 나를 끌고 마당으로 나갔다.
「괜찮아?」
「괜찮아. 걱정 마.」
「대신 사과할게.」
「귀한 동생 아프게 했다고 두드려맞지 않은 게 어디야.」
「아픈 건 당신이었지.」
「그래서 후회해. 내 주제에 가족이라니…」
「나야말로 그렇게 두고 나와 내내 후회했어.」
아내는 나의 왼팔을 자신의 무릎 위로 가져갔다. 영문을 몰라 바라만 보는 사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다. 숨겨두었던 손목이 훤하게 드러났다. 뿌리치려 했지만 아내는 놓아주지 않았다. 길게 난 자상의 흔적을 보란 듯이 어루만졌다.
「이제는 감추지 않아도 돼.」
「…미안해.」
아내는 나를 당겨 힘껏 안았다. 위축된 등을 두드리며,
「당신 잘못이 아니었어.」
바라고 바라던 용서의 말. 나의 구원자, Maria.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image_©Hans Adolf Büh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