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난한 너를 위하여 [2부 4월 4일]

by 성냥팔이 소년


인쇄 후 첫 책을 받았다. 내 이름이 새겨진 진짜 책. 손에 들고도 믿기지가 않아 책장이 닳도록 넘겨보았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애타게 기다리던 네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미팅을 마치고,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문해교실 졸업생들의 시화전을 관람했다. 무대에 나와 직접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중 한 할머니의 사연이 긴 시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나이 여든에 처음으로 글을 배워 삐뚤빼뚤 써 내려간 그녀의 첫 편지는, 먼저 간 반려자에게 보내는 연서였다. 청각 장애로 평생 아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며, 할머니는 발표하는 내내 커다란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훔쳤다.


어두워지는 표정을 감출 길이 없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소되지 않는 울한 감정이 계속해 속내를 소란하게 했다.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후련해지지 않았다. 뱉어내야만 할 것 같은 답답함.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기자기한 모양의 과자점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네가 뿌리쳤던 그날의 케이크가 생각났다. 무작정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진열장에 놓인 색색의 마카롱이 눈에 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기 가진 사람이 먹어도 괜찮을까요?」


「인공색소를 사용하지 않아 어머님들도 많이 구매하십니다만…」


학생으로 보이는 점원에게 곤란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서둘러 주문을 했다.


「중간 사이즈 한 세트 포장해 주세요.」


인테리어만큼이나 색이 고운 상자를 받아들고 상점을 나오니, 신기하게도 묵직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아내가 운영하는 책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아내가 깜짝 놀란다.


「무슨 일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말없이 가져온 쇼핑백만 내밀었다.


「??」


「생각나서 샀어.」


상자를 열어보는 아내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예쁘다. 먹기에 너무 아까운데?」


가방에서 책을 꺼내 건넸다.


「책 나왔어.」


아내는 선뜻 받아들지를 못하고, 내 이름이 적힌 표지만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해냈네. 결국.」


조금 일찍 가게를 정리하고, 아내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장미 넝쿨이 흐드러지게 얽힌 돌담길을 나란히 걸었다. 연애를 하던 대학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발자국 떨어져 걷는 것. 멀거니 아내의 손을 바라보았다. 노을에 젖어 무척이나 따스해 보이는 손. 하지만 빈 손. 그 안이, 그 결이, 기억나지 않았다.


「정이야.」


「응?」


「손잡아도 돼?」


「…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다음에는 그러고 싶어서,라고 해줘요.」


「그러게… 매번 이렇게 서투르니, 삶에도 리허설이 있으면 좋겠다.」


「두 번은 없다.」


「Wislawa Szymborska?」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스스로가 별것이 아님을 깨닫기까지 꼬박 이십 년이 걸렸고, 그래도 괜찮다 인정하기까지 이십 년이 걸렸다. 혈안이 되어 찾던 네잎 클로버 따위 그만 잊어주기로. 흔한 세잎 클로버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꽃말처럼.


아니, 행복하지 않아도 좋다. 신기루 같은 무지개를 좇느라 현재까지 놓치는 미련을 더는 떨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너와 나. 너의 날숨이 나의 들숨이 되는 이 순간이 더욱 희소하고 간절하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1-25.©Marianna Fost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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