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가난한 너를 위하여 [2부 4월 4일]

by 성냥팔이 소년


어렵사리 한 권의 책을 끝까지 공부하고, 제자들과 책거리를 했다. 뒤풀이로 무엇을 사줄까 물으니, 입을 모아 떡볶이가 먹고 싶단다. 들뜬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양 떼를 이끄는 목자처럼 꼬마들을 한데 모아 걸어가는데, 모퉁이에서 거세게 돌진하는 덤프트럭을 마주쳤다. 판단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 선두에 있던 아이를 감싸안았다. 넘어지며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는 응급실 침상에 누워 있었다. 각종 기계음과 분주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움직이는 나를 발견하고는 간호사가 다가와 의식을 확인한다.


「환자분, 여기는 병원입니다. 제 말 들리세요?」


「…같이 있던 여자아이는 무사한가요?」


「가벼운 찰과상이라 처치 후 보호자분께 인계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환자분은 추가 검사가 필요합니다.」


「괜찮습니다. 바로 퇴원하겠습니다.」


「그게…」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선생님, 필요한 검사 전부 해주세요.」


칸막이 천을 밀어내며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함께 다친 제자와 …아내였다.


「선생님!」


아이는 뛰어와 나를 부둥켜안았다. 한가득 울음을 머금고는,


「죽지 마요! 아프지 마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녀였다. 죽음의 문턱에 설 때마다 나를 지키는 너.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은 담당 복지사에게 제자를 보낸 뒤,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았다.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잔뜩 굳어졌던 아내의 표정은, 퇴원해도 좋다는 최종 진단을 듣고서야 예의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아내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말이 없었다. 이따금 곁눈으로 나의 상태를 살피는 것 말고는 묵묵히 운전만 했다.


한참 후 정차한 곳은 집이 아닌 대형마트의 주차장이었다.


「기다려. 장 좀 봐올게.」


반 시진쯤 지나 차로 걸어오는 아내의 양손에는 식료품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무척 무거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내려 거들어야 했지만, 온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젖은 솜처럼 가라앉던 육신은 공기 속에서도 부력을 느끼고 있었다. 아내는 뒷좌석에 짐을 싣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나를 흔드는 아내의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걸을 수 있겠어? 부축 해줄까?」


「혼자 내릴게. 어서 가. 힘들 텐데.」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보다 앞서 우리 집이었던 나의 집에 들어섰다. 장 봐온 것들을 허전한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이윽고 무언가를 끓이려는지 주방을 뒤적거렸다. 서둘러 그녀를 막아섰다.


「홀몸도 아닌데, 무리하지 말고 가서 쉬어.」


「저녁만 해놓을 거야.」


「내가 어린애인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


「그렇게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말랐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꿈인지 생시인지, 냄비를 젓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 오른쪽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화가 난 것일까. 애쓰는 것일까. 무엇이든지, 여전하게 미안했다. 나도 모르게 아내의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정이야.」


「오랜만이네,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


「필요하면 말해.」


「??」


「없는 편이 나을 테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아버지라는 간판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 새사람 생길 때까지는-」


「됐어.」


아내는 대답과 동시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꺼버렸다.


「…조금 주제넘었나, 내가.」


「그런 파리한 몰골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진심이야.」


「됐다고. 다 필요 없으니까…」


아내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살아만 있어.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야.」




image_©Holly Warbu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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