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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Sep 07. 2023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 2-3분간 꽉 눌러주세요."


건강 검진 차 찾은 병원에서 혈액 검사를 받았다. 주사 바늘이 팔의 얇은 살을 뚫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픈가? 아닌가? 주사기에 채워지는 붉은 피를 바라보다 느닷없이 아빠 가느다란 팔이 떠올랐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앙상한 팔. 피가 나오는 게 신기하고 아까워서 가슴 졸던 때가 몇 달 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뽑아야 되죠?"


수납 통합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대형 병원에서, 진료 과가 다르다는 이유로, 피를 요구하고 대기번호표 뽑듯 무심하게  갔다. 그때마다 붉은 액체가 작은 유리관에 채워졌고, 그때마다 신기하고 아까워가슴 졸였다. 금식, 지루한 기다림, 넓은 병원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 우리가 환상을 쫓는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감각 없 내뱉는 주치 말을 하나라도 놓칠까 봐 조바심이 났다. 다음 진료와 필요한 검사 예약을 잡으라고, 검사 당일엔 금식하고 혈액검사부터 받으라고 했다. '다음'은 '가능성'을 의미하므로 생의 마지막 몇 달이 될 거라 믿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그들의 '다음'은 우리 환상을 강화해 주었으니까.


 떠나신 지 백일 훌쩍 지났는데, 느닷없이 생각지 않은 곳에서 아빠 흔적을 만다. 지하철 2호선 계단에서,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시장 골목 순댓국집 앞에서, 수박이 쌓여있는 과일가게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을 거면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거면서 자꾸만 나를 흔든다. 아빠 없이 살아가는 게 처음인 삶을 이제 시작해야 하는데,  이제 물어볼 사람이 없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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