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소설이다. 등장인물도 스토리도 지극히 단순하다. 곤충채집을 위해 사구(砂丘)를 찾아온 남자가 모래구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를 만나 평생 모래를 퍼내야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탈출을 기도한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다분히 시지프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시지프와 다른 점은 지은 죄가 없음에도 형벌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벌을 받는 이유는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그걸 암시한다. 그 문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벌은 재미를 느끼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있다.
숙박지를 찾다가 남자는 부락사람들의 용의주도함에 속아 모래구덩이 속에 갇히게 된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그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계속 탈출을 시도한다. 자신의 원래 생활로 돌아가기 위한 발버둥이다. 살아남기 위해 모래를 퍼내야 하는 그의 삶은 마치 동일한 궤적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물체와 같다.
그런 그의 활동에 여자는 구심력의 역할을 한다. 여자에게는 그저 삶을 유지하려는 본능만 남아있을 뿐이다. 먹고 배설하고 모래를 퍼는 일이 삶의 전부다. 도무지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삶은, 원 궤도상에 있는 물체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구심력이 커지듯 그에게 더욱 탈출욕구를 증가시킨다. 그뿐 아니다. 여자는 물체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는 에너지원의 역할 또한 자처한다. 큰 불평 없이 남자의 고독감을 해소시키고 성욕을 분출시키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체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전후 사정을 더듬어볼 때 자의적인 냄새가 강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히려 구심력을 더욱 키워서 남자의 무게에 자신의 몫까지 편승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부락주민들은 그 반대의 힘인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부락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여자와 그녀의 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그 집이 모래 속에 파묻히는 순간 도미노처럼 그 불행은 자기네들을 향해 덮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집을 유지해야하는 그들로서는 모래를 계속 퍼낼 노동력이 필요하다. 남자를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 번 탈출을 시도한 남자가 모래 늪에 빠져 다 죽게 되었을 때 굳이 살려서 구덩이로 되돌려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던 원심력과 구심력은 남자가 ‘희망’이를 통해 구덩이 속에서도 물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균형이 깨어진다. ‘희망’이가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 없게 만들면서 부락주민들과의 협상에서 유지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임신을 하면서 상황은 의외의 국면으로 흘러간다. 부락주민들은 출산을 위해 여자를 구덩이에서 꺼내준다. 그리고는 새끼줄 사다리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남자에게 탈출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탈출을 포기한다. 이 또한 힘의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여자가 구덩이 밖으로 나간 것은 원심력이 사라진 것으로, 사다리가 방치된 것은 구심력이 없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힘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물체의 운동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 결과 남자는 구덩이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남자가 탈출하지 않은 실제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물을 얻게 되면서 사실상 탈출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탈출구를 알게 되는 순간 그 공간은 이미 외부공간과 동일한 환경이 되는 법이다. 편도표가 아닌 왕복표를 가진 경우에는 여행기간 동안 구태여 돌아올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음으로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바깥 면과 안쪽 면이 동일 공간상에 위치한다. 막상 탈출이 가능한 시점이 되었을 때 남자는 모래구덩이 속과 바깥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토록 자신이 탈출을 통해 가려했던 목적지는 자신이 원래 탈출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 그곳 역시 그저 반복되는 일상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자신이 곤충채집을 떠나온 것도 바로 그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한 것일까?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이다. 즉 희망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책 속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농부의 일은 땅을 늘리면 더 늘어나는 셈이다.’ 그 말은 농부가 자신의 땅을 늘리고 싶어 하지만 땅이 느는 순간 일거리가 더 늘어나 결국 고생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끝없이 모래를 퍼 올려야하는 여자의 인생을 소설의 주된 소재로 삼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점이다. 철창 밖에서는 사람들이 원숭이를 구경하지만 철창 안에서는 원숭이가 사람을 구경한다. 모래구덩이 속의 삶과 밖의 삶 역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구속감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 가진 힘은 그저 무기력하다는 점이다. 바람에 의해 날아드는 모래 앞에서 부락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 삽질이 전부이지 않은가.
다분히 염세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 나는 마라톤을 취미로 갖고 있다. 그럼에도 뛸 때마다 매번 힘들어한다. 그걸 이기기 위해 매일 일정한 거리를 뛰면서 체력을 키우려 노력한다. 달리는 일에 익숙해져 고통을 잊게 만들려는 것이다. 모순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무언가에 익숙해져 습관화되면 지루함을 느낀다. 그러면 변화를 꾀하며 무언가를 바꿔보려 한다. 힘들면 익숙해지려하고 익숙해지면 또 바꾸려드는 것,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그저 닥치는 대로 순간을 열심히 살면 그뿐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다루지 않은 남자의 이후 삶을 그려보면 그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는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고는 모래구덩이 속에서 새로 탄생한 아이와 함께 삽질을 숭고한 노동으로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여자의 단 하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라디오를 구입해 바깥세상의 소식을 들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