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 세스 노터봄

by 원광우

제목에서부터 철학적인 냄새가 진하게 났다. 평소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의 손은 자연히 멈칫거렸다. ‘의식’을 의식한 무조건 반사였다. 그러나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편식이 바람직하지 않듯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좋아하는 분야만의 독서를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좀처럼 접하기 힘든 네덜란드 작가의 작품이지 않은가. 난 용기를 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 나의 용기는 만용으로 밝혀졌다. 소설은 난해함으로 치달았다.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무슨 일이든 어려운 일일수록 끝냈을 때의 성취감이나 보람은 더 커진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반복해서 읽기를 마다않았다. 그래도 의미를 알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책의 페이지는 계속 넘어갔고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의 능력은 거기까지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지만 내 ‘의식’은 그저 흐릿할 뿐이었다.

난해함의 원인은 세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은 사건의 시간적 흐름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연대순으로 기술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 역시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다보니 내가 현재 읽고 있는 시간적 위치를 종종 놓치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내용의 표현방식을 들 수 있다. 비유적 표현이 많은데다 그 비유라는 것도 단순히 일차원적이지 않다. 거기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여 나타나기 일쑤고 그런 가운데 현실세계에서 접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가 다루어진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두 분야의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가톨릭 신자였던 까닭에 종종 등장한 미사의례나 가톨릭교리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철학적 지식의 부재는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했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있다. 각 부의 중심인물은 서로 다르다. 인니 빈트롭, 아르놀트 타츠, 필립 타츠가 그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과 상이점이 존재한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점들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정신작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리라. 인간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시간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세 사람은 모두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삶에 대해 뚜렷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만 한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앙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신앙을 상실한 것이 먼저인지 현실도피시도가 먼저인지는 애매하다. 그걸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논쟁을 벌이는 일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현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인니는 여자와의 정사를 탈출구로 삼는다. 아내 지타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는가 하면, 고모집의 하녀인 페트라와도 여러 차례 관계를 가지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비둘기 소녀와도 서슴없이 성행위를 한다. 죄책감도 없으며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시 여긴다. 반면 아르놀트 타츠는 시간의 노예가 되는 방법을 택한다. 철저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삶 자체를 하나의 루틴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일상에 익숙해져 삶 자체를 습관으로 인식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필립 타츠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찾는다. 선이나 요가, 다도와 같은 명상을 통해 도(道)의 경지에 이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타츠 부자 간에는 인니와는 다른 둘만의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다. 인니가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을 그냥 되는 대로 놓아둔데 반해 타츠 부자는 자신들을 어떤 틀 속에 가둠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으려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세 사람 모두가 추구하는 종착지는 동일하다. 그들은 최종적인 구원을 자살로 인식한다. 물론 이런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타츠 부자는 죽었지만 인니는 살아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르놀트 타츠의 경우 자살이 명확한 사실로 들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첫 문장에서 인니 빈트롭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아르놀트 역시 산속에서 얼어 죽었다고는 하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산을 찾은 것 자체가 자살을 위한 예비적 행위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만큼 나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삶은 나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이들이 삶에 관해 고뇌했다면 난 죽음에 관해 성찰한 적이 많다. 심지어 오랜 시간을 두고 죽음 생각에 깊이 빠져든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어떤 확신도 가질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 공포만 더욱 크게 느꼈을 따름이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피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라면 굳이 떠올려 괴로워할 필요 또한 없다고. 그저 죽음의 순간이 닥쳐올 때까지 외면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당연히 자살이란 나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위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난 낙천주의자라 단정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미화하는 듯한 그들의 철학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덕분에 나의 가치관을 재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들이 삶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면 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삶을 택한 것뿐이다.

keyword
이전 06화케이크와 맥주 - 서머싯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