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소년기의 '8할'은 '오락실'이었다"
내 청소년기의 '8할'은 '오락실'이었다
- 나의 '오락실' 식민기(期)와 유람기(記)
단돈 백원 들고 오락실에 몇 시간 죽치다가 가방이나 실내화주머니 같은 거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
백원 중 오십원은 오락하고 나머지 오십원은 동네깡패형한테 걸려서 헌납한 기억이 있는 자,
나중에 커서 어른되면 오락실을 차리거나 오락실가게 딸한테 장가가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 자,
청소년기의 이 자들을 급히 찾을 일이 있다면 동네 오락실로 가보면 된다.
삐삐나 휴대폰 없던 시절에도 바로 찾을 수 있다.
1. 1985년, 나의 영웅 - '너클 조(Knuckle Joe)'
198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내 또래의 우리 동네 꼬맹이들을 계속 밖으로 불러내던 형님이 한 분 계셨다.
바로 '너클 조(Knuckle Joe)'.
깡패집단의 왕보스 아래 행동대장이 셋 있는데, 세판마다 나타나는 그 자들을 물리치고 마지막 열 두판째에 덩치가 너클죠의 열 배는 되는 왕보스를 깨면 독수리 훈장과 함께 다시 열 두판이 반복되는 사이클이다.
지금 보면 허접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 당시에 1년 동안에는 내 일상의 '8할'을 차지했던 게임이다. 그림 이미지가 화투장과 비슷한 게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으면서 어디에 있든 수시로 생각나곤 했다.
달랑 50원 가지고 몇 시간을 무한반복하다가 오락실 주인 아저씨가 기어이 기계를 끄고 연탄집게로 쫓아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추억의 오락 중 하나다.
대략 10만점이면 열두판을 한 번 도는데, 대부분 오락실에서 10만점 이상 되면 영락없이 주인 아저씨가 와서 기계 전원을 껐다. 아주 야박한 오락실은 5만점 제한도 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5만점 이하의 점수로 열두판을 깨지는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아마도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약 7~8년간 내가 오락실을 집보다 더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도 1985년도, 바로 이 '너클 조' 덕분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아침에 등교하다가 오락실에 들러서 손가락이 까지도록 너클 조의 주먹 버튼을 긁던 당시의 기억,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오락을 하다가 해가 많이 올라온 후에야 학교로 뛰어가던 기억, 지각해서 야단맞으면서도 하교길에 다시 들러서 '너클 조'의 멋진 모습을 또 한 번 봐줘야 했던 그 기억들이 아련하다.
1985년, 나의 영웅은 단연 국적 불명의 '너클 조'였다.
2. '변신'과 '합체', '우정'과 '절교'를 동시에 - '사이드 암즈(Side Arms)'
1986년 또는 1987년 초중등 전환기에 내겐 절친 민수가 있었다.
지금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호기심 많고 아주 똑똑한 친구였는데, 내 어릴적 '지식'이란 게 만약 있었다면 그 '8할' 또한 그 친구 덕이다.
둘이 매일 하던 '사이드 암즈(Side Arms)'가 있었는데, 이 게임은 '관점'이 달랐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게 아니라 옆에서 보는 게임의 원조였다. 그 뿐만 아니라, 비행기가 로봇으로 변신하고 그 기체들이 다시 비행기로 변해 더 큰 로봇으로 합체까지 했다.
로봇 좋아하던 중학생들은 난장법석을 떨었는데, 이 게임은 두 친구 사이의 우정과 의리를 시험하기도 했다. 즉, 두 기체가 하나로 합체되었을 때 한 명은 조종관을, 한 명은 무기를 다루는 분업과정에서 '우정'과 '절교'의 선을 마구 넘나들었다.
1970년대에 나가이 고의 제자 이사가와 켄이 그린 '게타로보'는 '사이드 암즈'보다 앞서 나온 만화로 세 개의 기체들이 서로 순서를 바꾸면서 세 가지의 합체로봇이 되는 획기적인 합체로봇물의 원조다.
이 중 1호기 류마와 2호기 하야토는 틈만 나면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갈등하는데, 같은 편끼리 어느 때는 적보다 더한 복잡한 심리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사이드 암즈에서도 주도권은 조종관에 있었고 무기는 자연스레 조이스틱을 쥔 자의 명령에 따르게 되었다. '무기(Arms)'가 역시 '부수(Side)'라서 '사이드 암즈(Side Arms)'였던가.
어른이 되는 건 '가면'이 두꺼워지는 과정이니 어른들은 안그렇겠지만, 중학생들은 '절교'를 가끔 한다. 그 중 '오락실 절교'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사이드 암즈'의 '주도권 갈등'은 그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오락실에서 내면화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몇 년 후 절친 민수와의 '절교'의 맹아가 아니었을지.
3. '군부독재 타도' - '스트리트 파이터' 원조 버전
1987년,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가 나타났다.
당시 이문동 외대앞에는 그 일대 최대의 오락실이 있었다. 이름하여 '외대오락실'.
외대 정문에서 바로 길건너, 지하와 1층에 대규모 '오락단지'가 있었는데, 1986년, 87년에는 한창 외대앞 삼거리에서 최루탄과 아스팔트 돌멩이들이 많이 날아다녔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최루탄 원없이 마시고 다녔다. '교투'가 있었던 다음날 아침에는 학교가는 게 아주 고역이었다. 그 아침에 가로수 나무만 흔들어도 주변 사람 몇 명은 픽픽 쓰러져 갔다.
하교길에 데모 구경하다가 더 이상 최루탄 연기를 못참을 즈음 되면, 우리 꼬맹이들은 '군부독재 타도'와 '호헌철폐'와는 상관없이 셔터를 내리고 성황리에 영업중이던 '외대오락실'로 잠입했다. 당연히 돈은 없었기에 대부분 구경을 많이 했겠지만, 그 시절, 그 중에도 가장 사람이 줄을 많이 섰던 오락 중 하나가 이 '스트리트 파이터' 원조 버전이었다.
이전까지는 기껏해야 버튼이 세 개 이상을 넘지 않았지만, 스트리트 파이터는 양태가 각기 다른 주먹지르기 세 개, 발차기 세 개 등 총 여섯 개의 버튼을 복잡하게 조작해야 했으며, 꼬맹이들의 코묻은 돈을 엄청나게 먹은 후에야 '장풍'이나 '회오리 발차기' , '승룡권' 같은 기술을 알려주었다.
아니, 기계가 알려주었다기 보다는 어디서나 있을 법한 정말 뛰어난 선진그룹의 인자들이 발견을 했던 것인데, 나는 남들이 발견한 그 기술도 제대로 조작을 못해서 가뜩이나 없는 돈에 쭈쭈바 사먹을 돈 아껴서, 한 올당 십원씩 어머니 새치 뽑은 돈을 아껴서 고스란히 기계에 바쳐야 했다.
기계치에 가까운 나는 여러 가지 버튼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지 못하여 제일 센 버튼 두 개만 주로 쓰다가 상대의 필살기에 허무하게 쓰러지기 일쑤였고, 거듭되는 패배가 하루 세 끼 밥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더 이상은 좌절되지 않을 즈음에서야, 스트리트 파이터에 대한 사람들의 열기가 다 식은 후에야 비로서, 마지막 판인 태국의 '사가트(Sagat)'를 때려눕힐 수 있었다.
세계최고의 무에타이 고수인 그가 나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나 혼자는 감격스러워 울가망했지만 주변상황은 그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무술의 고수가 이미 등장하고 난 후였다.
'스트리트 파이터2'가 나왔던 거다.
나는 '스트리트 파이터2' 최고의 무술고수, '바이슨(Bison)'을 상대하기 위해 열심히 무예를, 아니, 어머니 새치를 더더욱 가열차게 뽑기 시작했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 정권이 민중에게 무릎을 꿇고 직선제를 받아들였으나 민주화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 후계자에게로 권력은 이양되고 있었다.
4. '열사'가 '전사'에게 -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권력에 의해, 부조리한 체제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은 많이 있어왔을 테지만, 1991년도는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청년학생, 노동자들이 죽어간 해로 기억되고 있다.
권력과 자본에 항거하다 산화하신 분들을 우리는 '열사'라 불러왔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대열을 잇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 어쨌든 1991년은 전경의 집단구타로 돌아가신 강경대 열사로부터 시작하여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많은 사람들이 '열사'가 되었는데, 그 해 5월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우리의 '귀정누이', 김귀정 열사도 있다. 왜 하필이면 말만 들어도 가슴 저리고 슬프도록 시린 햇살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5월이었는지.
그 해에 나는, 귀정누이가 운명을 달리했던 을지로 백병원 앞 노태우정권 타도를 위한 3차 범국민대회장에 있지도 않았고, '열사'를 지키기 위해 한 학기 이상을 길거리에서 까먹었을 귀정누이의 학우도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서, 예의 그 '외대오락실'을 도장으로 삼아 열심히 '무예'를 닦고 있었지만, 역시나 타고난 천성상 무예의 낙제생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91년에 아무도 동전을 넣지 않던 스트리트 파이터 원조 버전에서 태국의 무에타이 고수 사가트를 꺾고 감동해 마지않던 나는 또 다른 강적들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바로 스트리트 파이터2 버전이 나온 해가 1991년이었다.
사실, 스트리트 파이터 원조 버전에서 격투기게임에 소질이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스트리트 파이터2 버전은 많이 하지는 않았다. 대신 하늘의 배려는 공평한 법인지 비행기타고 총알을 요리조리 피하는 오락에는 소질이 있어서 종목을 바꾸고 있던 참이었다.
원조 버전에서는 류와 켄만이 주인공이었지만, 이번 버전에서는 여덟 명의 '전사'들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고, 스피드와 재미가 원조 버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획기적이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최고 무술 고수들은 총 네 명이었는데, 하필 소비에트 인민군복을 연상시키는 바이슨(Bison)-색깔도 붉은-, 스페인 투우사를 연상시키는 베가(Vega), 마이크 타이슨을 모델로 한 듯한 발록(Balrog), 그리고 내가 어렵사리, 또는 엉겁결에 물리쳤던 사가트(Sagat)가 가슴에 상처를 입고 더 강력한 모습으로 등장했으므로 난 감히 도전해 볼 엄두를 못내고 애꿎은 비행기들만 부수면서 '전사'들의 화려한 솜씨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후 스트리트 파이터2'(대쉬) 버전은 이 4인의 고수들도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데, 어쨌든 그 해 1991년에 무술 낙제생인 나는 '전사'들의 현란한 싸움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2년이 지나 대학에 들어간 해, 귀정누이의 추모제는 아쉽게도 참가를 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 추모제 참가를 종용하던 90학번 회근형의 설득에 문과대(유학대) 1층에 있던 과방의 창살을 붙잡고 버티던 기억. 그리고 회근형에게 했던 말, "김귀정이 왜 열사냐"고 따지던 그 때, 1993년의 5월엔 정말 몰랐다. 권력과 자본에 저항했던 수많은 '전사'들이 있었고, 또한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락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전사'들의 화려함은 알면서도, 정말 치열한 현실에서 기술이 현란하지는 않지만 기억해야 할 '전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스무살 봄의 나는 부끄럽게도 아직 몰랐다.
이후 철이 좀 들었고 남은 대학생활 동안 귀정누이 기일에는 총학생회 버스타고 모란공원에 갔다. 대학졸업 후 90학번, 91학번 선배들이 때마다 모란공원을 찾아갈 때도 선뜻 따라나서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나 자신, 입에는 '저항'을 담았으나 실제로는 시대에 저항하고 '열사'를 지키던 '전사'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일게다.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고단한 현실의 빛나는 '열사'들과 '전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5. 첫 번째 '대입'과 열네 번째 '대선' - 스트리트 파이터' '챔피온 에디션'
개인용 컴퓨터(PC)가 보편화되기 약 이십여년 전, 이 기준은 내가 PC를 구입하게 된 것이 2001년도 즈음이니까 대략 그렇다는 건데 어쨌든, 1990년대 초반에는 오락실에서 사춘기의 '욕정'을 발산하던 까까머리들이 정말 많았다. 나도 실력으로 하면 그 대열의 선두에 서지는 못했지만, '춘리'의 속옷을 보고 싶어 갖다 바친 재물과 시간을 두고 말하자면 맨 앞에 서고도 남았다.
그 당시 동대문구 이문동의 고수들이 모두 모였던 '외대오락실'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 즉 속편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이백대는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한참동안 동전을 쥐고 줄을 서야 했고, 또 그럼에도 고수들의 화려한 무술실력을 감탄 또 감탄하면서 동전쥔 주먹을 더 꼭 쥐었다. 물론 언급했듯이 난 그 줄 중에도 가장 뒷줄, 아니면 굳이 줄을 서지 않아도 돈만 있으면 하루종일 혼자 할 수 있는 비행기 오락 따위를 하다가 중간중간 감탄하곤 했다.
역시 격투기게임의 전성기를 열었던 것은 단연 '스트리트 파이터 '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역시 나와 내 친구들은 수업과 야자 사이에도 잊지 못하고 오락실을 들러야 했는데, 스트리트 파이터 '챔피온 에디션'이 등장한 것이 그 즈음이었이었던 것 같다.
이전 속편은 총 여덟 명의 쌈꾼들을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반면, 사실 그 정도도 너무 복잡해서 나는 적응을 잘 못했음에도, '챔피온 에디션'은 속편의 무술고수 4인방이 추가되어 총 열두 명의 쌈꾼들을 선택할 수 있게 하여 수많은 매니아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러면 뭐하나. '무도장의 낙제생'이었던 내가 스트리트 파이터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 된 게 바로 이 '챔피온 에디션'부터였으니.
수많은 쌈꾼들의 다양한 기술들을 도저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게 된 나는 급기야 이후의 격투게임 일체와의 작별을 고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다.
외대오락실로 향하던 그 광적인 발걸음이 갑자기 뜸해진 것이 '대입'이라는 생애 첫 번째 큰 사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이 '챔피온 에디션' 때문이었는지.
이 기억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열네 번째 치러졌던 '92년 '대선'이 나의 '대입'보다 먼저 있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당시 거무스름한 두루마기를 걸치고 모여든 군중들을 혼내는 건지, 아니면 유세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던 백기완 선생을 TV에서 처음 본 것이 그 때였다. 물론 백선생은 '87년 대선에서 민중진영 독자후보로 처음 나왔던 터였지만, '87년의 나는 대선 후보 넷만 겨우 기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92년 그 해말, '90년 야합의 부산물, 군부독재의 서자인 민자당 후보 김영삼이 '군부'가 아닌 '문민'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대학시절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장 증오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92년도 열네번 째 치러졌다는 '대선'에서 첫 번째 '대입'을 치르던 난 투표권도 없었고 관심은 더더욱 없었지만, '민중후보' 백기완 후보의 '백선본' 이야기는 첫 번째 '대입'을 거쳐 이듬 해 대학에 들어간 후 선배들한테 참으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열네 번째 '대선'의 경험은, 1%대의 지지를 위해 믿거나 말거나 몇 달을 길거리에서 보냈다던 '백선본'의 경험은, 나와 같은 '문민정부' 학번과 그 이전 학번을 구별짓는 가장 명확한 구분점이 되기도 했다.
역시나 세대는, 생각과 사상이 아니라 경험으로 인해 본질적으로 차별화된다는 또 하나의 유물론적 진리를 배운 계기였고,
이제, '챔피온 에디션'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나는 오락실을 떠나서 살게 된다. 적어도 스트리트 파이터의 기억 따위를 중심으로 돌던 내 머릿속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뒤틀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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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이전의 '질풍노도'의 '아노미 현상' 시절,
내 청소년기의 '8할'은 단연 동네 '오락실'이었다.
아마도,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을 내 아들의 '8할'을컴퓨터 게임과 피시방이 '지배'하고 있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