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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y 15. 2021

[삼총사](1844) - 알렉상드르 뒤마

문학작품의 '사실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문학작품의 '사실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 [삼총사](1844), 알렉상드르 뒤마, 조정훈 편역, <구름서재>, 2020.





내가 초등(국민)학생 때 우리 식구가 살던 집은 큰 길가에 있는 건물 1층 가게터를 개조한 곳이었는데 아버지가 자재들을 깔고 장판을 덮어 울퉁불퉁 만든 임시 '거실'의 한 켠에는 노란색 표지의 100권 짜리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위인전집>이 있었다. '거실' 군데군데가 움푹 들어가던 그 상가터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1981년도에 서울로 올라와 사글세방과 여관방 등을 전전하던 우리 식구가 처음으로 오랫동안 정착한 집이었으나 우리 형제들이 제일 싫어했던 집이었다. 어쨌든 '정착'이었으니 동화책과 위인전 한 질이 처음 들어와 있었다. [보물섬], [빨간머리 앤], [삼총사], [작은 아씨들], [소공자], [소공녀], [타잔], [플란다스의 개], [코난], [괴도 루팡] 등이 떠오르는데, 프랑스의 '괴도 루팡'이 비웃던 영국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없었음이 아쉬웠고, 세계 위인들 보다는 [김유신], [계백],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윤관], [이순신] 등의 갑옷을 입은 눈이 찢어진 무서운 초상화를 표지로 했던 우리 역사 '장군들' 위주로 읽었던 기억이 함초롬하다. 고려 시대 강감찬과 윤관은 무반이 아닌 문반이었으므로 '장수'는 아니었으나 어린 시절 나의 위인은 무조건 '장군'들이었다. 이후 중학생 시절까지 탱크와 전투기, 군함 등속에 환호하며 '전쟁'과 '전투'를 동경한 것이 유년 시절 남자 아이들의 본래 특성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20여 년 이상 존속되던 '군사독재정권'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차 대전 일본의 전쟁무기는 차마 대놓고 좋다 하지 못했지만 저 멀리 유럽 전장의 나치 전쟁무기들을 더 좋아했던 것을 보면 '군사독재정권'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세계정복의 야욕을 부리는 윤박사나 닥터 헬을 혼내주던 로보트 태권브이나 마징가를 아무리 보면 뭐하나. 현실의 지배자들이 '독재자'면 아이들의 일상도 '파시즘'이 된다. 가정과 학교를 지배하던 가부장적 분위기는 사회 전체를 '군대'식으로 조직하려던 '독재자'들의 문화 자체였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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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당시 가장 좋아했던 소설(동화)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같은 모험소설이었고, 서울 청량국민학교 특활반으로 '독서반' 들어간  특별활동 준비물이었던 책을 예의 <세계문학전집> <세계위인전집>에서 쉽게 조달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학기 내내 나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들고 다녔는데, 딱히  소설이 좋았다기 보다는 사실은 책상에 앉아서 소설  권을  읽어내지를 못해서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을  나이에 동화와 위인전 '전집' 앞에서 책등을 바라보고 앉아있곤 하던 나는 놀랍게도   권을 제대로 독파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매주  시간이던 '독서반' 특활시간마다 나는  가져오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매번 [삼총사] 꺼냈고 달타냥이 말을 타고 파리로 상경하던 장면을 무한 반복하여 읽곤 했다. 아마도 고등학교 올라가서 매번 마음을 다잡고는 [수학의 정석] <1 - 집합> 수백번 읽던 형태의 원형이었겠다. 읽은 횟수로 치면 '집합 박사' 되었겠지만  그랬던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학기 내내 읽었으니 지금도 초라한 말을     자루와 편지   달랑 들고 있는 돈키호테 비슷한 주인공 달타냥의  삽화가 뇌리에 또렷하다.  당시 누구도 내게 책을 이어서 읽으라는 얘기를 안해 주었나 본데, 장편소설을 독파할  있게      중학생이 되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읽게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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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Tous pour un, Un pour tous!"



17세기 프랑스 시골지방 가스코뉴의 귀족 아들인 달타냥이 파리로 상경하여 루이13세의 친위대 비슷한 '총사대'를 기웃거리던 중 그 유명한 '삼총사'와 친해지고 시덥잖은 모험을 하다가 '총사대' 간부가 된다는 이야기인 [삼총사]는 19세기 다작으로 이름을 얻은 극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 1802~1870)의 소설이다. 왕정의 극작가였던 뒤마는 신문 연재소설로 유명해졌는데 '역사소설'을 썼다지만 그닥 깊이는 없다. 아마도 '통속' 연애소설과 같은 '통속' 역사소설이었으리라. 고증이나 역사관 따위는 없다. 요즘의 '퓨전' 창작사극 비슷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린 왕 루이13세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 모험소설의 '악당' 격인데 그 무슨 역사적 배경설명도 맥락도 없다.

아마도 주인공이기에 왠지 정의로울 것 같은 달타냥이나 아토스, 포르투스, 아라미스 '삼총사'는 실제 알고 보면 내키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쌈박질을 일삼다가 사고치고 나서 루이13세에 대한 '충정'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양아치'들 비슷하다. 아마도 당시 프랑스 궁정은 '총사대'에 군인으로서 급여를 주지 않았을 것이며 '총사'들은 민중들을 상대로 '삥'을 뜯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삼총사' 중 아토스는 '몰락 귀족'이나마 재산이 있었을 것이고, 포르투스는 그냥 '깡패'였을 것이며, 그나마 아라미스는 '성직자'처럼 금욕적인 모습으로 보이나 세부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의 주인공 달타냥으로 치면, 앞뒤 안 보고 성질 건드리면 칼을 뽑고는 결투를 신청하거나 악녀 밀레디든 유부녀 보나시외든 가리지 않고 예쁘기만 하면 무조건 들이대는 '망나니'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결투에서 대부분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전쟁터에서도 총알이 피해가는 것을 보면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근현대 무협영화 '공식'의 기원일 수도 있겠다. 달타냥의 하인 플랑셰의 급여와 월세는 어떻게 충당했을지는 모르지만 돈 없으면 칼을 뽑고 얼토당토 않은 모험 중에 왕궁이나 귀족들로부터 우연히 받은 돈뭉치로 연명했을 것이리라. 그럼에도 달타냥과 '삼총사'의 모험은 어린 남자 아이들에게 '사나이 로망'을 불러일으켜 주었는데, 다 큰 후에 그들의 모험이 시덥잖아 보이게 되었어도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Tous pour un, Un pour tous)!"라는 구호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울림을 준다.





"작품은 어떤 작업의 산물이자 기술의 산물이다. 그러나 모든 기술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술사나 흥행사의 일이 아니라 '노동자'의 일이다. 이 노동자의 힘은 '무(無)'로부터 완전히 선택된 형식을 생겨나게 하는 전혀 기적같은 것이 아니다... 텍스트 '생산자'로서의 '작가'는 특히 그가 가지고 일하는 재료들을 만들지 못한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1부. 몇 가지 기본적 개념들>, 1966.



뒤마는 이런 시덥지 않은 '통속' 소설을 쓰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으나 방탕한 생활로 늘 궁핍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공장'처럼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했다고 한다. 동시대 발자크나 20세기 피츠제럴드 같은 삶인데, 그들의 작품은 '깊이'는 없지만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군더더기 없이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결코 의도하지는 않으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한 인물들의 묘사로 당대 지배계급의 '이념'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는 것인데, 발자크와 피츠제럴드가 부르주아적 물질만능의 '사실주의'를 본의 아니게 묘사하고 폭로했듯, 뒤마 또한 '궁정암투'를 그린 '역사소설' [삼총사]를 통해 '절대왕정' 및 '왕국'을 둘러싼 '민족전쟁'과 '왕정'에 대한 맹목적 충성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그려내고 있는 '사실주의'적 동화가 아닐까 한다.



'소설 생산 공장'이라 불린 뒤마의 작업실은 '창작'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한창 공장제 대량생산이 시작되던 19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한 반영일 수도 있다. 20세기 프랑스 구조주의 문학비평가 피에르 마슈레는 문학작품은 새롭게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재료'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생산' 과정이며, 문학비평은 이렇게 '생산'된 작품들이 지닌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또 하나의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발자크에 대한 엥겔스의 '사실주의'적 문학비평이 그랬고, 쥘 베른에 대한 레닌의 '과학소설' 문학비평이 그랬는데, 이들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실주의' 문학비평의 근저에는 '계급투쟁'의 현실이 깔려 있었다. 발자크와 피츠제럴드는 결코 '계급투쟁'의 현실을 말하지 않지만 그들의 우스꽝스런 인물 묘사는 그런 현실에 대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 '계급투쟁'의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폭로하고 만다. 뒤마의 '통속' 역사소설 [삼총사] 또한,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에 대한 무사들의 '충정'과 미인을 향한 남자들의 '기사도'를 통해 당대 지배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부조리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뒤마 또한 발자크나 피츠제럴드처럼 결코 의도하지 않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사실주의'적으로 '생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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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데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만큼 진도가 잘 나가는 장르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은 내게 끈기있게 독서를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다작'을 통해 '통속소설'을 '생산'하는 작가는 많지만,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보면 시덥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장편'을 만들어내는 힘을 느낀다. [회랑정 살인사건](1991),[용의자 X의 헌신](2005) 같은 본격 추리소설은 그렇다 치고, [위험한 비너스](2016)나 [녹나무의 파수꾼](2020) 등의 소설은 소소한 드라마를 보듯 작은 소재로 장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물론 누구든 쓰려면 쓸 수는 있겠지만, 다수의 독자가 그 글을 읽어주는 것은 또 별개일 게다. '읽기'는 이미 '생산'된 작품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어떤 때는 새롭게 '재생산'하는 행위일 수도 있으니 모든 글은 읽히기 위해 '생산'된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 자체가 대가의 '상품'이 되어 그런 시시콜콜한 소설 '생산'이 가능하리라 싶지만, 많이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의미로 '재생산'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1985년 등단 후 꾸준히 글을 쓴 것이지 뒤마의 '소설공장'처럼 찍어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살인사건'이나 엽기적 행각이 아닌 소소한 이야기로 드라마 같은 소설을 '생산'하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현대사회의 어떤 면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폭로할지, 그의 작품을 읽고 '파괴'하고 '해체'하며 '재생산'하는 독자와 비평가의 몫이겠지만, 뒤마의 [삼총사]라는 동화를 통해 당대 지배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읽듯 다수의 독자와 비평가들은 나름의 '재생산'을 할 것이며, 그 '과학'적 토대는 바로 '계급투쟁'의 지금의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근작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서서히 자리잡는 레이토 이야기의 출발이 이 시대 '청년 실업'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


1. [삼총사](1844), 알렉상드르 뒤마, 조정훈 편역, <구름서재>, 2020.

2. [녹나무의 파수꾼](2020), 히가시노 게이고,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2020. 외

3.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1966), 피에르 마슈레,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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