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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Jan 22. 2022

'폭격기의 달'이 뜨던 시간 : 1987~1989년

[폭격기의 달이 뜨면](2020) - 에릭 라슨

'폭격기의 달'이 뜨던 시간 : 1987~1989년

- [폭격기의 달이 뜨면](2020), 에릭 라슨,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2021.




1.


민수가 어느 순간 변했다.

중학교 때까지 나랑 단짝이었던 친구 민수가 어느날부터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사실 초등(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내내 나의 친구는 민수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도, 일요일에도 거의 나는 민수네 집에서 주로 놀았다. 호기심 많은 '똘똘이 스머프'를 닮은 안경 낀 민수는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게 참 많았다. 전반적으로 성장이 늦은 나는 녀석을 따라다니기만 해도 똑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1990년에 민수와 나는 학교 철봉대 밑에서 다른 중학교 출신의 친구들을 여럿 만나기 시작했고, 열댓 명의 친구들이 모여 '철봉파'를 결성했을 때 민수는 더 이상 철봉대 밑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변한 건 민수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랐다.


민수의 특기는 1,2차 세계대전의 역사였고 주특기는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의 전쟁기계 이야기였다. 중학 시절이던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나는 민수가 들려준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야기와 녀석이 보여준 전투기/전차/군함 '대백과 사전'을 함께 읽으며  당시 <해문> 출판사의 '팬더 종이공작' 시리즈로 나온 독일의 킹타이거, 판저, 롬멜 습격포 전차와 포케 볼프, 메셔슈미트 전투기, 비스마르크 전함 등의 종이공작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중학교 때는 둘이 집에서 수많은 종이공작과 프라모델을 만들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행적을 쫓느라 다른 친구들과 뛰어놀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같이 진학한 초반은 토요일 하교 후에 민수방에 가서 당시 채널 2번 'afkn' 미군방송에서 하던 'WWF' 미국 프로레슬링을 보고 따라하느라 한때 여념이 없었는데, 내가 더이상 쉬는 시간 복도에서 '랜디 더 마초맨 새비지'의 '빅 엘보 드롭'과 '릭 더 모델 마텔'의 '보스턴 크랩 홀드'를 사용하지 않을 즈음인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어느 순간부터 민수를 철봉대에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역시 변한 건 민수가 아니었다.

성장이 늦었던 내가 부쩍 컸고 더 많은 친구들을 찾으면서, '단짝'이었던 내가 변했던 거다.




2.


"... 크고 정말 끔찍한 '폭격기의 달(bomber's moon)..."

- 1940. 11. 15. 보름달밤, 런던, '매스옵저베이션'의 어느 일기기록원.



중학 시절, 나는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신비주의, 아리아(게르만) 순혈주의 등을 읽었지만, '파시즘' 일반은 잘 몰랐다. 나는 오로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전쟁기계에만 관심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보다는 추축국 독일과 더 나아가 일본의 전투기와 전차, 전함과 항공모함에 평균 이상으로 광분했다. 욕정이 넘쳐 '단순무식폭력'으로 점철된 관심사였으나 머리가 없으니 결코 사상적일 수 없었던 당시의 어린 나에게 훗날 욕정은 좀 줄고 머리가 조금 생긴 후의 나는 감사해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멋진 전쟁병기들의 위용이 아니었다면 나는, 몇 년 후 '네오 나치'의 광신도나 '일베'의 원조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신비주의적이고 음모론적인 한편 교조적이고 편집증적인 측면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밀교'와 '오컬트'의 그림경전인 오기노 마코토의 일본만화 [소년 공작왕]을 좋아했고, 세상만사에는 온갖 주술적 '음모'가 숨어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딘가에는 아직도 '성배'와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다니는 히틀러의 후예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역시 다행인 건 나는 '악당(The Vile)' 편이 아니라 이를 막는 '선한(splendid) 공작왕' 편이었다는 거다. 물론 '공작왕'은 선악의 짬뽕이었지만 결국에는 착하게 살았다.

아무튼, 1987~1989년 중학교 다니던 당시 내 머리 위로는 독일의 단발 전투기 포케 볼프와 메셔슈미트, 쌍발 이상인 융커스와 스투카 폭격기가 매일 날아다녔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 에릭 라슨(Erik Larson)의 2020년 논픽션 소설 [폭격기의 달이 뜨면]의 제목을 페이스북에서 보았을 때, 작가와 내용, 목차 따위를 더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제목만으로도 바로 구입해야 할 책이었다. 원제는 [The Splendid and The Vile]이니 번역하면 '천사와 악마' 또는 '선과 악' 정도 되겠으나 2021년 국역판 제목 [폭격기의 달이 뜨면]은 책을 덮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잘 지은 것 같다.


배경은 1940년 5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의 '런던 대공습' 1년의 기록이다. 독일 공군의 '보름달 밤' 대공습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영국공군의 독일 공습으로 주거니 받거니 밝은달이 뜨는 밤마다 수십만 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의 수천 회 출격으로 기록된다. 당시 과학으로는 단발식 전투기가 한 번에 90시간 정도 밖에 못 날았다고 하니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전투기들이 떴다 내렸다를 번갈았을 게다. 수십만 톤의 독일제 고폭탄은 '여리고의 나팔'이라 불리던 매우 기분 나쁜 공포를 수반하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영국의 런던과 주요 도시들에 떨어졌지만 바로 터지지 않은 폭탄도 많았단다. 일제시대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 중 하나는 터지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여럿이지만 1940년 5월 영국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이 중심인물이라 봐도 무방하다. 처칠의 전기나 관련 기록은 많으나 에릭 라슨의 이 논픽션 소설은 처칠과 그 일가 및 측근과 주변인물들의 육필기록을 소재로 하고 당시 영국의 여론조사 같은 '매스옵저베이션(Mass-observation)' 기록원들의 '일기'를 곁들여 처참한 런던 대공습을 매우 '처칠스럽게' 묘사하고 서술한다. 20세기 '제국주의' 전쟁의 끝판왕이었던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의의 따위는 집어치웠다. 오로지 처칠과 그 관련 인물들의 일기장을 유머러스하게 조합했다. 18세기의 에드워드기번이 4~5세기 고대 로마를 개그어린 시선으로 조망했듯이.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1

https://brunch.co.kr/@beatrice1007/181



"그리고... 우리는 깨진 병을 집어들고 싸울 것이오. 가진 게 빌어먹을 그것 밖에 없으니까."

- 1940. 6. 4. 하원 연설, 처칠.


1940년 독일의 대공습 개시 국면에서 영국 총리가 된 처칠은 '열정'과 '의지', '용기'와 '고집', 그리고 '유머'의 대명사와 같다. 독일에 의해 북유럽과 프랑스가 파죽지세로 항복하고 수만의 영국군들이 물자는 다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덩케르크 대철수' 이후의 고립된 상황에서도 '대영제국'의 '결사항전' 의지를 고집스럽게 사수했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유머'와 '개그'를 잊지 않았던 처칠과 영국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공습으로 수천 명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옥상에서 현장을 지켜보겠다고 우기며 잠옷 같은 걸 입고 술 마시다가 굳이 올라가겠다고 우기는 처칠과 전쟁의 와중에도 역사를 인용하며 온갖 역설과 반어법을 구사하는 그의 연설에서 다소 초현실적이지만 '여유'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18세기 영국의 대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자주 읽었다는 보수정치인 윈스턴 처칠의 면모다. 그는 '자유'를 앞세웠지만 '대영제국'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보수당 정치인이자, 언제 어느 때든 에드워드 기번의 본을 따라 '유머'로 역사를 받아치는 정치 개그맨이었다. 생긴 것도 어찌보면 우습다. 진보정치인이라 결은 다르지만 역경 속에서도 늘 여유를 잊지 않던 우리의 노회찬 의원의 넉넉한 웃음이 교차된다.


( 1943년 얄타회담의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 )


영국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전 또는 물자지원을 끈질기게 요청하는 그의 연설은 아마도 그 바닥에서는 매우 유명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그의 연설은 물론 그의 비서와 막내딸, 폭격의 공포에 둘러싸인 영국사람들의 목격담과 일기의 구절들이 정확히 처칠 식으로, 아니 기번 식으로 즐비하다. 예를 들면, 1941년 4월 16일 '폭격기의 달'인 밝은 보름달 아래 런던 공습의 대참사 속에서 한 가톨릭 사제는 "어느 술집 당구대 아래에서 술집 주인과 가족들의 고해를 받았고", 처칠의 망나니 아들인 랜돌프의 가엾은 아내이자 스물한살의 조숙한 며느리 파멜라와 미국 대사 해리먼은 어느 방에 들어갔는데 "폭탄이 떨어질 때 옷도 흘러내렸다"는 식이다. "대공습은 누군가와 침대로 들어가기에 아주 좋은 구실이지"라는 누군가의 사후평가를 남기면서 말이다. 물론 상류층 얘기겠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은 대공습의 참사 속에서 내일 살아있을지 어떨지 기약이 없었기에 오늘 만난 사람과 바로 침대로 들어갔고 처칠의 막내딸은 공습을 피해 사교파티를 전전하며 일기를 남겼다. 작금의 코로나 재난 중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놀고 먹고 자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처칠과 전시내각 관료들 또한 대공습 1년간 주말마다 알고보면 폭격으로부터 별로 안전하지도 않은 체커빌 별장으로 가서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며 국사를 논한다. 세월호 참사날 박근혜의 '7시간'은 찜쪄먹는 이러한 비상식적 행태들과 기록들은 아무리 옛날옛적 이야기라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희대의 사이코 히틀러도 똑같은 미치광이였지만 전시에 처칠처럼 참사현장 순회하면서 목욕물 데우라고 짜증내거나 매일 술담배에 쩔어있지는 않았다고 하니 이 처칠이라는 위인은 정말 기이한 인물이다.


근거도 없이 용감한 처칠이 결국 영국을 구하고 전시내각을 성공적으로 이끈 총리로 남은 이유는 아무래도 히틀러의 전략적 착오 덕분이 아닌가 싶다. 영국왕립공군(RAF)의 전력이 독일공군(루프트바페)보다 우세하지도, 처칠의 전략이 치밀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 '제3제국군'의 전례없는 총공세의 효과를 너무도 맹신한 히틀러와 공군책임자 헤르만 괴링의 자만으로 영국의 항전의지를 얕보고는 1941년 6월 전선을 소련침략의 동부로까지 확대한 독일의 전략적 오류가 주원인이었다. 이 동부전선으로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독일의 전력은 영국의 서부전선과 리비아 사막의 남부전선 등으로 분산되었고 런던 대공습은 처참했지만 1년 간만 집중되었다. 에릭 라슨의 소설 [폭격기의 달이 뜨면]이 바로 이 1년의 기록인 것이다.

1923년 '뮌헨반란'의 실패 후 히틀러와 함께 '감방'에 가면서부터 그의 최측근이 되었으며, 게르만 지정학자 칼 하우스호퍼로부터히틀러와 함께 '두 마리의 젊은 독수리'로 불리던 나치 독일 명목상 '2인자' 루돌프 헤스의 어이없는 1941년 비행쇼와 엽기행각은 역시 나치 파시스트들의 신비주의적 광기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3.


"나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 1940. 5. 14. 하원 연설, 처칠.


전시에나 영웅인 이 정치개그맨 처칠은 좌충우돌에 괴짜라 '대영제국'을 지킬 의지와 용기만 충만했지 정작 조국에 바칠 건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말고는 없었다. 사실 그 누군들 조국과 역사 앞에 그 이상을 바칠 수 있을까마는, 위기의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가 저런 연설을, 그것도 정치적 반대파가 째려보고 있는 하원에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처칠은 저 말을 대공습 1년 후 독일에 더 항전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여부를 본인의 신임투표와 연계하여 의회에 부친 1941년의 하원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리고는 압도적인 찬성표로 재신임을 받고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수많은 영국인들의 사기를 높였다. 숱한 폭격 현장을 돌아다니며 영국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장면은 의회의 정적들을 제치고 민중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정치적 연출이기도 했겠지만 처칠 또한 지속되는 대공습을 버티면서 총리를 환호하는 영국 민중들로부터 감명을 받고 눈물을 훔친다. 중년 여성 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그 와중에 개그를 치는 처칠은 말한다. 본인은 "영국인들의 용기를 높인 게 아니라 그들의 용기를 모은 것 뿐"이라고.

물론, 대의정치라도 주권은 인민에게 있는 터라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이후 치러진 7월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에 패해 정권을 내어준다.

그럼에도 이 괴짜 정치개그맨 처칠은 '삼국지' 조조처럼 '난세의 영웅'임에 틀림은 없다.




1년 간 런던 대공습으로 죽거나 다친 영국인이 5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대참사를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기억해도 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1987년부터 1989년까지의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돌아가 친구 민수와 함께 영국의 전투기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소환했고, 하늘에서 이와 맞서는 독일의 메셔슈미트의 매끈한 몸체를 더듬었다. 영국을 구한 스핏파이어가 독일 폭격기 융커스의 뒷꽁무니를 쫓으면서 이 대형 폭격기가 사방으로 퍼붓는 기관포를 피해 공격하는 상상을 하다가 처칠의 막내딸 메리가 남긴 하찮은 일기들을 수차례 놓치기도 했다.


결국 내가 변해서 철봉대를 떠난 나의 첫 친구 민수가 생각나는 이 밤하늘에 '폭격기' 융커스가 메셔슈미트의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습해 올 것 같은 보름달이 떠오른다.



***


1. [폭격기의 달이 뜨면(The Splendid and The Vile)](2020), 에릭 라슨,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2021.

2.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2012), Donny Gluckstein, 김덕련 옮김, <오월의봄>, 2021.

3. [제2차 세계대전](2014), 게르하르트 와인버그, 박수민 옮김, <교유서가>, 2018.

: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의 군사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간략한 서술로 2차 세계대전의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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