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죽음'
셰익스피어의 '죽음'
-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1933), 바너비 로스(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3.
"'셰익스피어의 사인이 무엇이었죠?'
'그거야 아무도 알 수 없죠.'
고든이 중얼거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 형태의 과학적인 분석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추측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오래전 <랜싯>지에 실려 있는 논문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는 갖가지 병이 복합적으로 발생하여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티푸스, 간질, 동맥 경화증, 악성 알코올 중독증, 신장염, 보행성 운동실조증 등 모두 열세 가지나 되는 병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것 참 재미있군요. 하지만 그 문서에 의하면...'
세들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살해당했어요.'"
-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 <27. 삼백년 전의 범죄>, 바너비 로스, 1933.
20세기 초 미국의 미스터리 소설가 엘러리 퀸(Ellery Queen)은 만프레드 리(Manfred Lee:1905~1971)와 프레더릭 다네이(Frederic Dannay:1905~1982)라는 두 사촌형제의 필명이다. 이들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그리스 관 미스터리], [로마 모자 미스터리] 등의 작품으로 이전 세기 애거서 크리스티, 코넌 도일 등으로 대표되던 영국 추리소설의 아성에 도전했는데, 거대한 전제 및 가설을 세우고 불가능 요소들을 소거하면서 오로지 연역적 논리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는 청년 탐정 '엘러리 퀸'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연역소거법'이다. 이들은 대공황의 불황에도 다작으로 승부했다. 그 중 드루리 레인(Drury Lane)이라는 똑같은 추리방식의 노년 탐정을 내세운 [X의 비극], [Y의 비극] 등 네 편의 소설은 바너비 로스(Barnaby Ross)라는 또 다른 필명으로 발표하는데, 오랜 기간 미국 독자들은 두 작가가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단다. 1930년대 엘러리 퀸 초기 미스터리는 같은 추리 스타일의 청년 탐정 '엘러리 퀸'과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의 경쟁구도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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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리 레인은 셰익스피어 연극을 하다가 은퇴한 유명 배우로 지금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 쯤 되겠다. 그는 귀머거리가 된 60~70대 노년으로 우연히 편지 한통으로 대서양 건너 유럽의 미제사건을 해결한 후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 등 미국의 비극 3종 세트를 해결하며 승승장구했지만, 1933년 셰익스피어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사건(Last Case)을 끝으로 활약의 종지부를 찍는다.
( William Shakespeare )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를 대표하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한때 영국이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던 대문호였다. 어떤 이는 그의 실존 자체에 의문을 두고는 그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고도 하고, 또는 여러 영국인들의 집단창작물을 '셰익스피어'라는 가공의 인물을 앞세워 창작자로 만들었다고도 했다. 그만큼 그의 죽음 또한 그 사인에 관한 의문들이 많았으리라.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은 삼백년 전 셰익스피어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을 중심으로 영국의 고서 수집가들과 고전 연구가들, 그리고 셰익스피어 극의 유명배우 드루리 레인 간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주제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사인에 관한 결론은 베일에 가려진 채로 끝나지만 고서 연구가들과 드루리 레인은 셰익스피어의 숨겨진 친필 사인 편지를 두고 서로 다른 목적을 이루려 한다.
물론 '최후의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주인공 드루리 레인이 그 자신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여 인류를 위해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은"(같은책, <30장>) 목적을 달성하면서 소설은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삼백년 전' 셰익스피어의 사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재영이 누나의 선물~ )
스무살에 내가 영문과에 진학했을 때 그 해 대학을 졸업하던 나의 둘째 누나는 [햄릿], [맥베드],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 등 4권의 책을 대학 입학선물로 건넸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좋아했지만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잘 몰랐을 내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대신 [오델로]를 넣으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 되었을 것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둘째 누나 송재영은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학이라는 곳을 간 '선구자'였다.
나는 위로 누나만 셋이다. 나와 4살 연상이었던 둘째 누나는 공부를 잘 했는데,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누나는 고등학교 시기 내내 아버지와 결연히 투쟁했다. 가난한 집에서 하나 뿐인 아들만 겨우 대학 보낼 생각이었을 우리 부모님은 의대를 가겠다는,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던 나의 둘째 누나를 대학까지 보낼 수가 없었나 보다. 어느날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심하게 맞으면서도 대학 가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던 재영이 누나를 보면서 소심한 중학생인 내 앞에 갑자기 '돈오점수'처럼 인생의 '계획'이 세워졌다. 덕수상고를 가서 은행에 취직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의 그 '계획'을 내 나름 용기내어 발설했을 때 부모님은 역시 강하게 반대하셨다. 어머니의 꿈은 내가 포항공대에 가서 탄탄하고 안정된 '기술직'이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아쉽게도 재영이 누나처럼 수학을 잘 하지 못했다. 아무튼, 둘째 누나는 결국 의대를 포기하고 생물학과에 들어갔는데 중간에 의대에 편입하려고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누나의 등록금 시기가 오면 돈을 구하기 힘들어 다투기 일쑤였고, 그럴수록 덕수상고와 은행에 대한 나의 '계획'은 갈수록 확고해졌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이룰 수가 없었으며, 나는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향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대입원서를 쓸 때 둘째 누나는 무조건 높은 목표를 향하라 계속 조언했지만, 용감했던 누나와 다르게 소심 끝판왕이었던 나는, 두려웠다. 과연 우리 집이 나의 재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 나의 대학등록금 시기에 부모님이 또 얼마나 싸우게 될지. 결국 그 문제는 어떻게든 운좋게 해결되었는데 그건 마지막 학력고사가 끝난 후의 일이었고, 둘째 누나는 시험날 새벽에 나를 꼭 시험장에 데려다 주겠다 우기며 집을 나섰다. 그 이후로도 오랜 동안 몰랐다. 둘째 누나가 아마도 막내 동생인 나를 통해 본인이 못다한 꿈을 보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것을. 대학 4학년 때 취직 생각은 안하고 소설을 쓰겠다던 나를 계속 불러내어 밥을 먹이며 나의 '계획'에 관해 집요하게 물어대던 모습이 지금은 아련하다.
누나가 대입 선물로 주었던 셰익스피어 비극 4권은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설렁설렁 읽었다. '문학'에 관심이 생겨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나의 소설쓰기 목적은 '소설'을 통한 '혁명'이었고 당연히 영문학에는 관심도 없었다. 3~4학년 전공필수였던 셰익스피어가 전공선택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차라리 국문과 소설 수업을 들었다. 4권 중 [리어왕]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는데 그게 새삼 마음 아프다. 누나의 선물을 더 소중하게 읽고 간직했어야 했다.
재영이 누나가 마흔네살로 나의 곁을 떠난 날, 맑은 날이었는데도 아주 잠시 비가 왔다가 갔다. 선뜻 잠들었던 나는 얼른 일어나서 옥상으로 뛰어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저 멀리 가는 둘째 누나를 다시는 못 볼 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항상 나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던 그 용감하던 비구름은 맑은 하늘 한켠에서 그렇게 멀어져갔다.
엘러리 퀸이 바너비 로스 필명으로 낸 마지막 소설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은 결국 '해결'되고 말았지만, 셰익스피어의 '죽음'에 관한 비밀은 밝히지 못하였다. 그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친필 편지는 풍문만 무성하되 결국 소설에 실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났을까.
드루리 레인의 최종 '해결'에도 불구하고 그 진위는 여전히 미궁이지만,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인류에게 그렇듯 나의 하나 뿐인 둘째 누나는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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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Drury Lane's Last Case)](1933), Barnaby Ross/Ellery Queen,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3.
2. [햄릿/맥베드/로미오와 줄리엣/리어왕], William Shakespeare, 신정옥 옮김, <전예원>, 1989~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