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과 [사마의] - 자오위핑(2012~2013)
죽은 '공명(孔明)'과 산 '중달(仲達)'의 '평상심(平常心)'
-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제갈량과 100여 일을 대치하다 때마침 제갈량이 병사하자 장수들이 군영에 불을 지르고 몰래 도망갔다. 백성들이 달려와 보고하자 사마의는 출병하여 그들을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인 양의가 군기를 돌려 북을 울리며 마치 사마의와 싸우려고 했다. 사마의가 몰린 적은 몰아붙이지 않아야 한다고 여겨 양의는 진을 유지하며 물러갔다. 며칠이 지나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영에 이르러 남은 물건들을 살피고 많은 서적과 군량를 노획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인하며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방현령 외, 7세기.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사곡도에서 나왔는데, 유마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으며, 무공현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남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항상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될까 근심하여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게 하여 장기간 주둔할 기반을 만들었다. 경작하는 자들은 위수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지냈는데, 백성들은 마음 놓고 편안히 지냈고, 군대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서로 대치한 지 100여 일이 지난 그해 8월, 제갈량이 병이 들어 군중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54세였다.
촉의 군대가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영과 보루, 거처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진수, 3세기.
"[한진춘추]에 이르길, 양의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사마의에게 달려와 고했고 사마의는 그들을 추격했다. 강유는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마치 사마의에게 향하는 것처럼 하자, 사마의는 곧 물러나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을 했다. 사마의가 퇴각하니 백성들은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라는 속언을 지었다."
- [삼국지(三國志) 주(註)], 배송지, 5세기.
제갈량(諸葛亮)은 자가 '공명(孔明)'이고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 유비가 형주 유표에게 의탁하던 시절에 기용한 지식인 참모다.
'삼국지 영웅'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전자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 후 '머리'도, '세력'도 없이 두주먹 불끈 쥔 '의지'만으로 버티다가 몰락하기 직전의 시절이고, 후자는 '머리'를 갖추고 '비전'을 장착한 후 대업을 향해 한발씩 전진하던 시기인 것이다.
제갈량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주전>에서 '선주'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를 통해 본인이 유비에게 기용된 과정을 말하는데, 이것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출전이다. 조실부모하고 형주에서 초막살이를 하던 제갈량은 늘 본인을 제나라 관중과 연나라 악의에 비유하며 언젠가 큰 뜻을 펼칠 것이라 장담하고 다녔지만 주변으로부터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서서와 사마휘 등의 지인들을 통해 본인의 홍보를 부탁하고는 '삼국지 영웅' 중 가장 열세였던 유비가 위기에 빠진 것을 알고 유비 스스로 본인을 찾도록 계획한다. 그것도 앞의 두 차례 방문에서는 만나주지도 않고 세번째 방문에서야 마루에서 자는 척 하다가 만나서는 여유롭게 '천하삼분지계'의 '융중대'를 연출한다.
47세 유비도 인재에 목말랐지만, 27세 제갈량도 당시 나이대에는 내심 느긋하지는 못했을터,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다. 다만, 밖에서 큰 소리 쳐서 상대를 불러들인 후 안에서 속삭이는 전술을 썼다.
이후 제갈량은 손권의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조조의 위나라를 적벽대전에서 패퇴시켜 북위가 더 남하하지 못한 채 위-촉-오 삼국이 솥발처럼 '정족지세'를 이루는 '천하삼분지계'를 확립한다. 제갈량의 이 '융중대' 전략은 당시 오나라 책사였던 노숙도 주장했던 것으로 강대국 위나라에 대항하여 2인자 오나라와 약소국 촉한이 연합하여 위나라가 망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적이 남도록 하는 계략이었다. 제갈량은 촉한이 오나라로부터 형주를 빼앗겨 벽지로 더 몰리고 촉한황제 '선주' 유비가 죽은 후에도 오-촉 동맹을 유지하면서 6차례나 위나라 정벌을 위한 '북벌'을 수행하던 중 오장원에서 '떨어지는 별'이 된다.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실력은 뒷받침되지 않는데 '비전'과 '명분'이 우선된 점도 있으나, 외부적으로는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사마의때문일 수도 있다.
사마의(司馬懿)는 자가 중달(仲達)이며 제갈량보다 2살 많으나 18년을 더 살았다. 위-촉-오 '삼국'을 잠시 통일한 '사마(司馬)'씨의 진(晉)나라 '고조(高祖)'로 추존되었으므로 '정사' [삼국지] 기록에는 등장할 수 없었고,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도 조조, 유비, 관우, 장비 등의 '1세대'가 다 죽고 제갈량이 남은 후에야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연의]에서는 거의 '신(神)'적 존재로 그려지는 제갈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묘사되지만 위나라 조조(무제)-조비(문제)-조예(명제) 3대를 섬기면서 조용히 힘을 길러 손자 사마염에 이르러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자기 통제의 승부사'가 바로 사마의 중달이다.
[삼국연의] '허구'이기는 하나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전'에 속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제갈량과 정면대결을 피하다가 여인의 옷을 선물받기도 했으나 웃으며 넘어갔으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었을 때는 제갈량의 계략으로 의심하여 공격을 머뭇거리다가 퇴각하는 촉한군을 놓치기도 한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은 [삼국지]와 그 [주석], [진서]에서도 일치하는 기록으로 사실일 것인데,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명해 정리한 '정사'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에 의하면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을 달아나게 했다"는 당시 민중들의 비아냥에도 "나는 산 사람을 잘 알지 죽은 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역시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라는 난세에 생존을 넘어 '비전'을 제시하고 '대업'에 도전하던 제갈량과 사마의는 기본적으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구보다 잘났고 목소리를 높이려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인물들임은 기본일텐데, 두 사람의 대결과정에서는 상대적 차이점은 일단 보인다. 즉, 제갈량은 '촉한정통론'의 명분에 입각하여 조씨의 위나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후한을 재건한 광무제 유수처럼 '북벌'을 포기하지 않는 '비전'을 가지고 궁벽한 촉한을 그나마 수십년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사마의는 조씨 3대 정권을 보좌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필요하면 병으로 다 죽어가는 연기까지 하면서 꾸준히 '대업'을 준비한 결과 위나라 정권을 갈아엎고 촉한과 오나라까지 정벌하고는 삼국통일을 이루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까지 다졌다.
'한왕실 부흥'이라는 제갈량의 '비전'은 '실패'했고, '새왕조 개창'이라는 사마의의 '대업'은 '성공'한 차이점도 있겠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더 많다.
우선 내부 조직 관리에서 본인보다 '조직'이나 '국가'를 우선하면서 사사로운 감정과 개인적 욕망을 조절했다. 결국 제갈량은 '북벌'의 '비전'을 위해, 사마의는 '혁명'의 '대업'을 위해 겉으로는 그랬다. 그리하여 조직 내부의 어떠한 도전에도 흔들림없이 스스로의 중심을 잡았다.
제갈량은 군사에 실패한 아끼는 수하 마속을 죽이면서까지 '북벌'을 위한 내부결속을 다지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를 낳았고,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이자 왕족으로 실권자였던 조상과 대립하지 않고 병으로 물러나는 위장술 이면에 착실한 준비를 통해 자식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공통점은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비전'과 '대업'의 목표를 놓지 않는 '주체성(主體性)'과 '평상심(平常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으로 차이점 하나를 더 들자면, 제갈량은 '북벌'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사마의를 제거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사마의는 세간의 비웃음을 감수하면서도 제갈량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을 수도 있다. 위나라에서 촉한의 제갈량을 대적할 사람은 사마의 뿐이었기에 제갈량이 없으면 본인의 군사적 입지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을 것인데 실제로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는 '혁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은 '공명(孔明)'이 산 '중달(仲達)'에게 더욱 치밀하고 굳건한 '평상심(平常心)'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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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2.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3.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