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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Nov 04. 2023

'이상한 나라'의 '구삼스(93s)'

- '93학번 입학기념 동기회

이상한 나라'의 '구삼스(93s)'

- '93학번 대학입학기념 동기회 : 2023.10.28 /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진욱이가 몇 주째 영문학과 동기들 단체카톡방에 계속 공지문자를 띄우고 있다.


올해로 대학입학 30주년을 맞아 영문학과를 넘어 대학 전체적으로 개최한다는 이른바 '93학번 '홈커밍데이' 참가독촉 문자였다.



1.


1993년 같은 대학 영문과 입학동기들 모임은 그래도 꾸준히 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매년 연말에 모이던 것이 뜸해졌다. 코로나 시기도 있었고 지난 수년간 과동기 송년회 참석인원도 계속 줄어든 터였다. 중년이 되어 다들 각자 삶의 현장에서 바빴기 때문일게다. 코로나 이전 가장 최근 모임 역시 너덧 명만이 조촐하게 한 잔 마셨다. 과동기회장 진욱이가 사회 각지로 흩어진 동기들을 챙겨서 그래도 7~8년 전만 해도 마포에서 스무 명 남짓 모여 밤새 송년회를 갖기도 했던 저력있는 동기회였는데 말이다.


그러던  2023 봄날 어느 저녁에 부친상을 당해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같은과 동기인 삼수생 진호형을 진욱이와 나를 비롯한 동기 다섯 명이 함께 만난 자리에서 우린 오래전 이십대 초반 대학 신입생 시절 이야기를 아주 오랫만에 나눴더랬다. 그리고 올해가 입학 30주년이니 영문과 '93학번 동기들에게 각자  연락하여  보던 얼굴들 많이   있게 송년회   거하게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30년 전인 1993년에 우리 과 입학생은 60명이었고, 대략 십년 후 인터넷 카페 시절에 내가 모은 동기들 명단은 약 30명 정도였는데, 30년 지난 지금 영문과 '93학번 동기 단톡방에 진욱이가 모은 인원은 19명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20명이었는데 '입학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 홍보문자가 난무하던 최근에 삼수생 동기 혜영이 누나가 나가버려서 19명이 되었다.


아무튼, 나는 일이 바쁘기도 했고 열정도 떨어져서 같은과 동기들한테 연락도 안하던 차에, 진욱이가 같은 대학교 전체 '93학번 홈커밍데이 초청문자를 보내온 거다.


말이 길었지만,

적어도 나는 진욱이의 '홈커밍데이' 참석요청에 빼박 못 간다 말할 수 없었단 거다. 단톡방 과동기들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이대로라면 영문과에서 진욱이 혼자만 가게 될테니 영문과 입학 30주년 송년회에 적극 찬동했던 나라도 가서 친구가 외롭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2.


"'아, 정말 이상한 꿈을 꿨어!'

앨리스는 언니에게,

여러분이 방금 읽은 모험 이야기를 최대한 기억해 내서 모두 해 주었다.

...

앨리스의 언니는 동생을 보내놓고

턱을 괴고 앉아서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어린 앨리스와 앨리스의 멋진 모험을 생각하다가

꿈 비슷한 것을 꾸었다.

...

언니는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있다는 것을 반쯤은 믿었다.

하지만 눈만 뜨면 이 모든 것이 단조로운 현실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앨리스의 증언>, 1865.



30주년 행사장에 도착하니 같은 해 입학했던 배구감독 신진식 선수가 제일 먼저 보였고, 준비위원들이 다짜고짜 친구라며 반말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라 했다. 진욱이는 마치 등교 이틀째의 신입생처럼 여러 사람들과 이미 '안녕~'을 외치며 손을 흔들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과동기 진욱이가 뻘쭘할까봐 마지못해 따라 갔다가 오히려 뻘쭘해진 나는 "여긴 이미 다 만나서 까신 겁니까?"라고 공손히 물었고, 행사 준비위원들로부터 "너도 좀 있으면 깔거야"라는 공손하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기념관에서 열린 행사는 무슨 디너쇼 비슷하게 초청공연과 다과와 무엇보다 그에 걸맞는 라운드테이블이 있었다. 동문회 행사는 그간 별로 관심이 없어 몰랐지만 총장과 총동문회장의 축사 등은 의례적인 학교행사인가 보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과 동기들은 처음 인사하고 바로 반말을 깠다. 이미 거의 준비위원급이었던 진욱이는 무차별로 깠고 나는 반은 까고 반은 높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광란의 댄스와 기차놀이 등이 시전되며 얼떨결에 행사장을 몇 바퀴 음악에 맞춰 돌았다. 배나온 준비위원장과 나보다 형같은 준비위원 아저씨 동기들의 비보잉을 보았고, 알고보니 진짜로 나보다 형인 머리 허연 전직 응원단장 동기의 응원단 율동도 목격했으며, 무용학과 동기가 다리찢기 할 때 나는 얼떨결에 바로 옆에 서서 매우 깜놀하고 있었다.


깜놀한 앨리스~


어색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갔을 때 갑자기 만난 동식물들과 다짜고짜 손을 잡고는 군무를 추고 키가 커졌다가 작아지기도 하며 정신없는 모자장수와 여왕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을,

그런 느낌적 느낌이랄까.


'이상한 나라'였다.


중년이 되고는 고등학교 동창과 대학 과동기 모임 말고는 그렇게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인 '반말까기'의 시공간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그 날 '이상한 나라'에서 만난 같은 대학 입학 동기들을 30년 전인 1993년에 만났더라도 이러한 총체적 무방비의 '반말까기'가 가능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1993년 입학 전 2월에 갔던 오리엔테이션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듯 싶지만, 그 날 30주년 행사장 그 곳은 어쨌든 내겐 '이상한 반말나라'였다.


"자~ 걍 까세요들~"


행사 내내 어색하다가 밤늦게까지 이어진 대규모 뒷풀이에서 나 또한 앨리스처럼 어느새 어색함은 잊고는 '이상한 나라'에 동화되어 웃고 떠들며 노래부르고 구호도 외쳤다. 처음 만난 동기들과 바로 말까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나라'의 반말 규칙을 이해했다.


동기라 반말은 하지만 중년이니 선을 넘지는 않을 거라는 암묵적인 믿음들,

처음 보았음에도 동기라 말은 까지만 서로를 존중하려는 배려깊은 눈빛들,

그 동안 사회생활로 각자 고생했을 서로에 대한 어느정도의 적정한 선의 격려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기들이라면 몰라도,

그날 '앨리스'로 빙의되어 처음 만난 '93학번 동기들로부터 받은 나의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이상한 나라'에 잠시 다녀왔다.


"다녀왔습니다~"



3.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금세 적응하고 놀다 와서는 언니에게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고 역시 '이상한 나라'를 잠시 다녀오지만 언니답게도 꿈과 현실을 구분한다.


아마도,

앨리스에게 역사책을 읽어주던 언니는 이미 '이상한 나라'에 동화될 나이가 지났을 테고,

역사책이 지루했던 앨리스는 현실이든 꿈이든 그 '나라'의 규칙 따위는 상관없이 바로 적응하는 순수한 나이였을 게다.


'이상한 나라'의 우리 '구삼스(93s)'는,

그날 각자 어땠을까.


잠시 다녀온 중년의 '언니오빠'들이었을까.

30년 전의 그 때 그 '앨리스'들이었을까.


https://brunch.co.kr/@beatrice1007/105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4


***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손영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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