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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10. 2018

파리지앵의 시간 속에서 살기

파리지앵 인테리어 07

파리지앵의 시간 속에서 살기 


82년생 김지영 씨를 비롯한 80년대생들은 팀킴의 김은정 선수를 ‘안경 선배’라고 불렀을 때, 곧바로 단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슬램덩크>에서 성실을 담당했던 바로 그 남자다. 나 역시 <슬램덩크>가 한창 연재되던 당시에 중학생이었고, 당연히 농구를 배웠다. 하지만 강백호처럼 매일매일 드리블 연습만 하다보니 점점 농구 자체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드리블을 건너 뛰고 곧바로 슈팅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야 다시 농구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농구를 하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 상태가 된 후에야 시합에 나가기 위해 다시 드리블을 필사적으로 익혔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이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7화인데 내내 기초만 얘기하고 있으니, 역시 인테리어 따위는 그만둘래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이미 생겼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껴 오늘은 잠시 점프해서 풋내기슛이라도 하나 넣어볼까 싶다.  


<슬램덩크>의 초기 명장면 중 하나


당연한 얘기지만 벽과 바닥만 파리지앵의 방 흉내를 냈다고 해서 곧바로 내 방이 파리지앵의 방처럼 보일 수는 없다. 다시 1화로 돌아가서(절대 기초로 돌아가는 건 아님) 파리지앵 인테리어의 핵심 구성 요소를 떠올려 보자.  


색, 빈티지, 예술, 그리고 꽃.  


이 네 가지 요소를 꼽았었다. 색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묶어서 말하자면 ‘파리의 문화’가 방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이 문화적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고민고민할 필요 없다. 답은 가구다.  


파리지앵의 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파리지앵에게 필수불가결인 가구가 바로 나의 공간 속에도 놓여 있어야만 한다. 우선 공간을 거실로 한정해보자. 파리지앵의 거실에는 무엇이 꼭 있을까? 정답은 바로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다. 참고로 이 두 가구가 꼭 별도의 거실에 있을 필요는 없다. 원룸이라고 해도 ‘거실의 기능’을 하는 공간에 있으면 그만이다.  


거실에 놓인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빠진 파리지앵 인테리어는 성립하기 어렵다


영화 속 파리지앵들은 늘 소파와 커피테이블 사이의 어딘가에 머문다


한국인의 소파라고 하면 역시 거실의 벽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사이즈에, 앉으면 엉덩이가 움푹 들어가는 가죽 소파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반드시 베프인 대형 벽걸이 TV가 있는 풍경. 이래서야 파리지앵 인테리어를 했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는 없다. 소파에 모로 누워 다리를 긁으며 (절대 긁지 않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드라마를 시청하는 황홀한 꿈을 잠시 접어두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파리지앵의 방에 필요한 것은 최대 2-3인용 크기의 귀엽거나 아름다운 소파, 그리고 커피 잔 두 개를 내려놓기에 적당한 정도의 커피 테이블이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다리를 긁거나 티비를 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책장을 넘겨야만 한다. 과연, 인생에 쉬운 일이란 이렇게도 없다.  


사실은 파리지앵도 TV를 보지만...


파리지앵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소개한 여러 책들을 살펴 보면 파리지앵의 가구에는 문화와 함께 ‘시간’이 담겨 있다. 할머니가 쓰던 식탁, 할아버지가 아끼던 의자, 엄마가 물려준 책장 같은 빈티지 가구가 30년 이상의 세월을 품고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꾸민 공간 속에 사랑스러운 시간이 담길 때 비로소 파리지앵 인테리어는 완성되는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5만 원에 구입한 후 8년 째 쓰고 있는 나의 커피 테이블. 스웨덴 신인 디자이너의 작품. 고가의 제품이어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생기는 게 아니다.


홍대의 가구점들을 배회하다가 흠결이 있어서 50% 세일을 한다는 포스트잇을 보고 주문해버린 3인용 빈티지 소파. 집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랑받고 있다

  



weekly interior point | 위대한 가구 디자이너들



파리지앵은 분명히 오르세 미술관 특별 전시 등에서 볼 수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의자나 탁자 같은 것을 사용하겠지? 그것이 그들에게 항상 역사와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거야... 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여러분의 집에서 조선시대의 선비가 사용하던 ‘서안’이나 고조 할머니의 ‘자개장’ 같은 것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파리지앵들은 우리보다 먼저 이케아의 고객이었고, 오랜 역사 동안 북유럽 가구의 주 소비층이었다. 파리지앵뿐 아니라 영국의 전설적 밴드 비틀즈도 ‘노르웨이의 숲’이란 노래에서 실은 “근사하지? 노르웨이산 가구야(Isn't it good Norwegian wood?).” 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본래 왕과 귀족들만이 주로 이용하던 화려한 의자를 오늘날의 보편적인 가구로 전환 시킨 것은 바로 북유럽 국가의 가구 디자이너들이었다. 그 중 오늘 소개하는 두 명의 거장은 그야말로 의자의 혁명을 일으킨 이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형마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자의 표준을 제시한 두 사람. 그 이름은 바로 아르네 야콥슨과 한스 웨그너다.  


 

아르네 야콥센 (1902 - 1971) 


자신이 만든 계란 의자에 직접 앉아 모델이 된 아르네 야콥센


덴마크 출신의 가구 디자이너인 아르네 야콥센의 의자를 아주 얄팍하게 정의하자면 ‘공용시설 의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사무실 의자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1952년 신소재인 성형합판을 가구에 혁신적으로 활용해 이른 바 <개미 의자>로 불리는 의자의 표준을 창조해낸다.  


단순히 멋과 권위를 추구했던 의자에서 벗어나 그는 인체공학을 통해 인간의 허리를 보호할 수 있는 형태의 굴곡을 넣은 특수한 실용성 의자를 만든다. 이어서 백조의자, 계란 의자 등을 연달아 발표한다. 그의 의자는 오래 의자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특성에 따라 기업과 관공서, 학교 등에서 폭발전인 인기를 구가하며 의자의 한 표준이 된다.  


아르네 야콥센의 초기 대표작 <개미 의자>


사무실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의자 형태의 기초를 제공한 아르네 야콥센의 <계란 의자>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견고함. 질리지 않는 단순미. 인체공학을 고려한 실용성. 아르네 야콥센 디자인의 특성은 곧 북유럽 인테리어의 특성이기도 하다. 


 

한스 웨그너 (1914 - 2007) 


이른바 가정용 의자의 거장 한스 웨그너


또다른 덴마크 출신의 거장 디자이너 한스 웨그너의 의자는 나무 소재를 이용한 팔걸이가 있는 의자의 표준을 제시했다. 아르네 야콥센이 ‘공용시설’ 의자의 표준이라면, 한스 웨그너는 ‘가정용’ 의자의 표준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그가 1954년에 발표한 <작은 곰>이라는 1인용 소파는 모던 소파의 정석과 같다.  


어린 시절 캐비닛 제작 업소의 견습공으로 일하며 목공 기술을 익힌 그는 가구 디자인을 배우기 이전에 덴마크 건축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다. 거기에 바로 위에 소개한 아르네 야콥센을 스승으로 두며 모던 디자인의 감각을 익힌다. 이렇게 전통 목공 기술 + 건축학 + 모던 디자인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1949년 미국에서 <의자>라는 이름으로 칭송 받았던 PP501/503 의자다.  


PP-501
PP-503
모던 디자인의 원형에 가까운 한스 웨그너의 소파


<의자>라는 이름이 ‘칭송’인 이유는 그의 의자를 본 전문가들이 “이것은 의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의자’입니다.” 라고 격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팔걸이가 있는 목재 의자는 모두 이 한스 웨그너의 자손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스 웨그너의 1951년작 <테디베어 의자>




* 이 칼럼은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HAGO와 함께 합니다.

새로운 칼럼은 매주 금요일마다 HAGO Journal 란에 선공개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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