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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an 01. 2024

삶은 결국 신의 주사위 놀이지만

아주 작은 펜트하우스 인테리어 부록


어째서 나는 월요일을 연재일로 선택했을까. 크리스마스에 이어 새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며 사서 고생도 참 가지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실토하자면 요즘은 글을 쓸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다. 초여름부터 연장된 에세이북 작업, 병행했던 장편소설, 그리고 11월부터 시작된 내 첫 문집 제작까지 계속된 강행군에 몸도 마음도 좀 지친 것 같다. 특히, 처음 내는 문집에 공을 들이느라 글 한 편을 가지고 스무 번 넘게 고쳐 썼는데… 이제 글자를 들여다보는 것부터 피곤할 지경이다. 요 며칠 쓴 글들도 발행은 했지만 영 마음에 안 든다. 한숨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얼마 전 리뷰를 쓰기도 했던 게임을 붙잡았는데, 중독이 되어 조이패드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출판사 등록 문제가 좀 꼬이고, 이런저런 생활의 문제가 뒤섞이다 보니, 문집의 12월 출간도 무산되고 말았다.


아무튼 12월은 가고, 2024년 새해가 왔다. 시간은 기억의 거리다. 내 삶 속의 어떤 장면은 지금과 더 가까이 있고, 어떤 장면들은 아주 멀리에 있다. 더 멀리에 있다고 해서 꼭 더 오래 전의 일인 것은 아니다. 가령, 슈퍼마켓에서 내 빨간색 씽씽이를 잃어버린 날은 엊그제처럼 가까이 있다. 2층집 소녀와 둘리가 그려진 일기장을 교환했던 열 살 무렵의 일도 지난주 수요일 정도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에 비해 혼자 렌터카를 몰고 경주 일대를 취재하러 쏘다녔던 기억은 전생의 일 같다. 우주가 신의 꿈이라면 아마 시간과 공간은 그런 식으로 뒤죽박죽 흩어져 있는 것일 거다.


문명인들은 그런 혼돈을 용납할 수 없기에 달력을 만들어서, 모든 일들이 마치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신앙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1년 넘게 백수로 멍하니 관전해보니 그 무엇도 순서에 맞게 발생하지 않았다. 나쁜 일은 반복된다. 보도매체들의 무관심 속에서 어디선가 좋은 일도 틀림없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계절의 순환처럼, 바꿀 수 없는 법칙처럼 역사는 번갈아서 진전하고 후퇴한다. 아니, 아마도 모든 순간 속에 진전과 후퇴는 함께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가 무엇에 더 집중하는가에 따라 원경이 달라 보일 뿐.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자아가 없다. 우리는 무아無我의 존재다. 싯다르타는 그것을 ‘오온五蘊의 순간적 집합’이라고 표현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기억하는 그 순간에만 우리는 존재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우주에 흩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양자론을 통해 최소 입자의 운동 원리를 공부해보면 과연 모든 것은 - 시공간마저도 -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존재와 사건이란 끝이 없는 광대한 물결 속에서 우연히 아주 잠시 한 방울 튀어 오른 물방울과도 같다. 위대한 신은 파라솔 아래 누워서 한가로이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하품이 나는 장면을 상상해보고 있노라면, 인생 그까짓 것이라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나는 통장 잔고가 잔인하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와중에도 새로운 커피잔을 질렀다. 참고로 우리 집에는 이미 50종이 넘는 커피잔이 있다. 어떤 고통도, 슬픔도, 집게손가락 모양을 하고 우주의 스케일로 쭉 확대해보면 이까짓 일로 만들 수 있다. 불교의 윤회론이 가진 장점은 어차피 또 태어날 거,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가지 뭐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업이 쌓여서 다음 생에는 공장식 축산 농장의 닭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란다.


2024년에는 어떤 것들이 모여 내가 될까. 삶은 결국 신의 주사위 놀이지만, 인간은 최소한 그 주사위 속의 숫자 범위 정도는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애써도 운이 나빠서 원하는 것을 못 이룰 수 있다. 그럼에도 애쓰는 만큼 불행의 범위를 좁히고, 행운의 범위를 넓히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참 절묘하게 설계한 도박이다. 난 스릴을 즐기는 편이라 올해도 계속 같은 것에 걸어보려 한다.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았다. 새해 벽두에 인테리어와 1도 관계가 없는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월요일 연재를 선택한 과거의 나 때문이다. 미래에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귀인이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몇 주 전의 나를 말려주시기 바란다. 2023년 12월 17일 저녁 7시 23분쯤으로 가주시면 된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인테리어 또한 오온의 집합이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시절의 감성, 지성, 사회성, 주머니 사정성, 또 무슨 성이 모여 집의 공간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죄송하다. 솔직히 이 말은 어떻게든 이 글과 이 브런치 연재의 연관성을 엮기 위해서 떠올린 말이다.


우야든지 할 도리는 다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 1. 1. 장명진.





P.S : 아, 새해부터 20여 년 정든 닉네임과는 작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원래는 이 이야기를 길게 쓸 예정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파라솔 아래의 신에게 묻고 싶군요. 그냥 쿨하게 떠나보내렵니다.


고마웠다, ‘멀고느린구름’아.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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