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y 25. 2022

노희경 특유의 대사에 대하여

'우블'의 비하적 표현은 왜 비하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우리들의 블루스(이하 '우블')에는 노희경의 작품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많은 소수자가 등장한다. 아니, 소수자라는 익숙한 에 담기 애매한 이들이 자꾸만 출현한다. 주변으로부터 눈총을 받고 움츠러드는 이들. 장애인, 장애인의 가족, 임신한 미성년자, 세 번 이혼한 중년 여,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중년의 여자, 아내에게 몰래 맞고 사는 남자.


많은 이들의 입술을 달싹거리게 할 조합이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고 있는 시청자들 앞에 노희경은 시원하게 돌직구를 쏟아낸다. 마치 여봐라는 듯, 듣는 사람의 민망함은 생각도 않고, '우블' 속 인물들은 비하적인 표현을 또랑또랑 읊어댄다. 


다운증후군 영희(정은혜)를 두고 동네 아주머니 "쟤 조금 모자란 것 같다"고 말할 때 그건 사회의 공기 중에 떠도는 비하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을 너무 담담하게 포착하고 있어 놀랍다.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런 말을 잘도 해댄다. 마치 이 말을 기어코 뱉어내겠다는 듯이. 그것이 그들의 소중한 임무라는 듯이. 그래서 노희경의 인물들은 종종 오로지 말을 하기 위해 그곳에 소환된 것 같다.


그러나 어째서 이 장면들은 천박하지 않은가. 무수한 작품이 그러하듯 폭력 현장을 고발한다는 핑계로 피해자를 값싸게 전시하며 시청률을 주워 담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노희경 작품에 나오는 비하적 표현은 어째서 비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것은 이 말들이 향하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노희경의 작품 속 비하 표현들은 비하의 대상이 아닌 발화자를 정조준한다. "쟤 조금 모자란 것 같다"는 말이 발화될 때,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영희가 아니라 그 말을 내뱉은 이의 모자람이다. 그 순간이 천박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흘린 입을 보고 있다.

이런 섬세한 연출은 영희를 둘러싼 서사, 그녀의 맑고 장난스러운 얼굴, 영옥(한지민)의 물기 어린 눈을 찬찬히 쓰다듬는 이 작품의 다정함에서 온다. 그 모든 순간을 거친 뒤에 영희에 대해 던져지는 비하적인 말을 접할 때 우리는 쾌감이 아닌 아픔을 느낀다.

그러니 노희경의 작품에서 비하적인 말들은 촉이 거꾸로 달린 화살이다. 그것은 입을 떠난 순간 그것을 내뱉은 사람을 향해 다시 돌아와 그의 인격에 생채기를 낸다.


그렇지만 노희경의 의도가 발화자를 '몰이'해서 함께 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비난이 아닌 인정인 것 같다. 생각해보자. 영희에 대해 모자란 말을 슬그머니 뱉어내는 저 아주머니의 허술한 태도가 우리와 많이 다른가? 우리 안에는 이런 더러움이 있고, 우린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그런 더러운 생각을 종종 해버리고 마는 게 바로 우리들이라고. 그러니 눈을 돌리지 말고 똑똑하 보라고 노희경은 고집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토해낸 말들 위에서 새로운 화해의 장을 주선한다. 너 사실 이렇게 생각하잖아. 근데 그 생각 때문에 쟤가 상처받았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우블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호식(최영준)이 인권(박지환)에게 힘겹게 말을 한다. 우리 딸한테 몸간수 못해서 임신했다고 말한 거 사과하라고. 차마 입에 담기도 아픈 그 말들이 기어코 발화된 뒤에 인권은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어쩌면 노희경이 생각하는 말들의 종착지가 바로 이 장면에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늘 사과와 화해에 닿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건 아마 노희경도 모를 것이다. 다만 그것에 닿기 위해 그들은 기어코 모진 말을 뱉어내고, 그걸 똑똑히 듣고, 주먹다짐을 하고, 피를 본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씩씩하고 용감하게 끌어안는다.


물론 위험 요소도 있을 것이다. 비하적인 말들을 직시하는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을 반복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노희경이 쓴 각본이라고 하여 늘 그런 위험을 완전히 도려낸 채 폭력의 잔혹함만을 깨끗하게 지시한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사실 이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그러니 그녀는 늘 높고 좁은 첨탑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위험한 곳에 있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우리 안에 숨겨진, 사회의 한켠에 웅크리고 있는 흉하고도 못난 마음을 직면하게 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다.  고집스러움이 미더운 것이다. 지금 우리 드라마 계에 이런 태도를 가진 작가를, 나는 노희경밖에 알지 못한다.



이전 15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양면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