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12. 2022

<수리남> 1화 해설 - '술의 에피소드'라 부르자

※ <수리남> 1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수리남> 스틸컷


<수리남>을 연출한 윤종빈에게는 한 가지 재주가 있다. 

그는 '물건에 정서를 담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예를 들어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는 건달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반달이' 최익현(최민식)의 신세를 '빈 권총'으로 묘사했다. 그는 총알이 없어 쏠 수도 없는 권총을 애지중지 들고 다닌다.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 아닌가. 정작 누군가를 해칠 능력도 배포도 없으면서, 건달들에 붙어 뭐라도 된 양 위세를 부리는 한심한 작태를 빈 권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빈 권총의 이미지는 <범죄와의 전쟁>의 정서와 결합해서 관객의 머릿속에 각인된 채로 오래 살아남는다.   


왜 일상에서도 그런 거 있잖아. 

육체노동자의 낡은 신발, 기자의 너덜너덜한 수첩. 그 사람의 인생을 한 방에 보여주는 물건들. 윤종빈은 그런 상징적인 오브제를 영화 안에 끌고 들어와서, 상황과 정서를 설명하는 영리한 감독이다. 


<수리남> 스틸컷

<수리남>에도 어김없이 의미심장한 사물이 등장한다. 

먼저 '홍어'. 

강인구(하정우)도, 그의 아버지도 홍어를 즐긴다. 홍어는 이 부자를 하나로 잇는 매개체이자, 인구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건 바로 '가족에 대한 묵직한 책임감'이다. 그들은 비릿한 홍어를 씹으며 무거운 책임감을 달래고, 가족들과 함께 보란 듯이 살 날을 꿈 꾼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이다. 술은 1화 내내 등장하며 이 에피소드를 이끈다. 

인구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울지도 못하고 술만 마셨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한 인구는 노래방에서 술을 팔며 살아간다. 그는 양주잔을 던지며 진상을 부리는 경찰관을 폭행한 계기로 수리남에 간다. 


자신을 위협하는 전요한(황정민) 목사에게, 첸진(장첸)은 의미심장하게 한 병의 술을 건넨다. 

그런데 이 장면은 꽤 이상하다. 맥락 상 전요한에게 모욕을 당한 첸진은 그에게 반발하거나 보복을 가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중국술 한 병만을 건네고, 전요한은 그것을 맛있게 먹는다. 이 장면은 꽤 길게 이어진다. 비록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어떤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를 주저하는 머뭇거림. 관객이 유심히 봐주기를 바라는. 

첸진이 중국술을 주는 순간부터 전요한이 한 잔을 마시기까지, 여기서 생겨난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장면이 끝나버린다. '해소되지 않은 긴장'. 그것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다음 장면, 인구와 응수(현봉식)는 전요한에게 보낼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응수는 인삼주를 전요한에게 보내지 않았다. 아까워서. 인구는 짜증을 내며 어서 보내라고 한다. 응수는 잠시 고민하다 알았다고 답한다. 인구는 전요한에게 전화를 걸어 인삼주가 곧 갈 것이라고 말한다. 알았다는 대답. 


이 장면에서도 다시 한번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대체 왜 인삼주에 대한 대화를 저리 길게 하나? 싶을 때쯤 장면이 끝난다. 뭔가 중요한 것이 나오려나 싶으면서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역시나 해소되지 않고 장면이 끝나는 것이다.


사건은 다음 장면에서 터진다.

인구가 군인들과 몸싸움을 하고, 총성이 난무한다. 결국 인구는 포획된다(이 장면의 미장센이 좋다).


앞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긴장감이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이다. 이유 모를 머뭇거림들은 이 순간을 예비한 것이다. 여기서 폭발하는 서스펜스는 그간 쌓여온 긴장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전요한이 받아먹은 중국술, 보내지 못한 인삼주가 만들어낸 갈등은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이 장면을 폭발시킨다. 쌓여왔던 긴장이 터지며 1화가 마무리된다. 


좋은 연출이다. 예상하지 못한 리듬의 서스펜스. 

여기서 윤종빈은 단순히 서사를 따라가며 1차원적으로 갈등-해소를 반복하지 않는다. 조용히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잠시 긴장을 머금은 뒤, 한 박자 뒤에 이것들을 폭발하며 에피소드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는동안 '술'은 모습을 바꿔가며 1화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연결 짓는다.

아버지가 마시는 소주, 인구에게 던져진 양주잔, 전요한이 받아마신 중국술, 보내지 못한 인삼주까지. 대체로 쓰고 때때로 달며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술. 그것은 인구의 인생과도 닮았다. 거기에는 향락과 불안이 동시에 담겨있다. <수리남>의 1화는 '술의 에피소드'라고 부를만하다. 



<수리남> 스틸컷

배우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황정민은 등장하는 순간 인상이 워낙 드러워서 별로여서 악당이라고 직감했다. 이제는 인상으로도 연기하는 정민찡 최고. 하정우는 가장의 책임감, 비즈니스 맨의 기민함과 능글맞음을 섞어 놓은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새로워서 좋았다. 예전만큼의 임팩트는 없어서 좀 아쉽다. 현봉식은 왠지 정준하를 연상시키는 푸근하고 눈치 없고 착한 친구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추자현은 배역을 가리지 않고 열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중국에서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악착스럽고 사연 많은 역할로만 자주 등장해서 좀 아쉽기는 하다. 팔자 센 역할이라고 해야 하나? <사생결단>(2006)에서부터 그랬지. 그 뚜렷하고 화려한 이목구비가 청승맞은 역할에만 소모되는 것 같아서 아까워. 그래도 참 잘하기는 하더라. 






관련 글, 


이전 17화 <작은 아씨들>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