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 댄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
그 누구도 모르게 음 비밀스런 사랑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
지하에서 위층까지 벨이 울릴 때까지
박진영의 <엘리베이터>라는 노래에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춤을 춘다. 아무도 모르게. 관객은 어쩌면 지루하게 CCTV를 지켜보다, ‘쟤 왜 저래?’ 하고 놀랄 경비 아저씨일 거다.
놀랍게도 춤을 춘지는 벌써 반년이 넘었다.
작심세달 배웠던 학교 댄스 소모임은 코로나 대유행으로 중단됐다. 내 춤 인생도 시작하자마자 이대로 끝나는 건가? 보내주려던 와중에 올해 5월(2021년), 댄서들을 모델로 광고를 찍을 기회가 생겼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파주 지하철 세트장에선 마지막 씬을 앞두고 댄서들이 단체로 춤을 맞춰보는 모습을 보면서 결심했다. 그래 춤을 추자. 나도 몸을 잘 쓰는 사람이 되어보자. 다음에 다시 댄서들과 광고를 찍을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전에 준비해보자.
그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처럼 댄스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알려주는 쪽집게 춤 학원. 공교롭게도 학원은 회사 앞에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8v_UXdBQtw
춤 잘 추는 사람들을 오래 동경해왔다.
자주 써서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댄서의 몸은 잘 차려입은 무대 의상 같아 보인다. 잘 춘 춤을 보고 있으면 잘 쓴 글 한 편을 읽은 느낌이 든다.
보아 언니를 보고 자란 초등학생 은정은, 되고 싶은 나에 대해 자주 상상했는데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가 춤이었다.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끝내주게 무대를 휘어잡는 나, 길거리 댄스 배틀을 구경하다가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어던지며 숨겨둔 춤 실력을 드러내는 나, 뭐 이런 스토리. 내성적 관종력과 자의식 과잉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춤을 출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반 대표로 또 학교 대표로 무대에 설 일이 종종 있었고 춤을 춰야 하는 순간도 생겼다. 쑥스러움을 잘 안 타는 편인데도 유독 리듬에 몸을 맡긴다는 느낌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머리랑 몸이랑 합의한 적 없는 막춤의 순간들은 뼈에 흑역사를 새겼고, 아 난 역시 몸치네. 이번 생에 춤은 아닌가봐. 결론 내리게 했다.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안 하던 짓 해보기'였다. 내 인생의 숙제들을 돌아봤다. 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이제 그만 못 출 때도 되지 않았나? 남은 인생은 더 이상 몸치로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부터 배워서 계속 추다 보면 언젠가 몸치의 상태는 벗어나 있겠지. 막연한 생각으로 일단 시작했다.
내 몸을 내 느낌대로 쓰기. 어떤 음악이 나오든 내 느낌대로 리듬 타기. 근데 그놈의 느낌이란 무엇인가. 작심세달 이것저것 배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느낌을 찾으려면 일단 기본기를 익히는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깎아가는 거다. 거울로 보이는 참을 수 없는 몸짓의 못생김... 춤 선생님은 자신의 몸짓을 보고 내적 갈등 중인 초보반 학생들에게 알파벳 얘기를 해줬다.
ABC가 뭔지 알아야
Apple을 만들든 Banana를 만들든 I have an apple이든 할 수 있잖아요.
춤도 마찬가지예요.
기본기를 잘 닦아야 춤을 빨리, 그리고 오래 잘 출 수 있어요.
춤의 기본기 '아이솔레이션'
몸 전체는 고정시키고 하나의 부위만 분리해서 움직이는 거다.
예를들어 가슴 아이솔레이션은, 가슴을 오른쪽→앞→왼쪽→뒤로 하나씩 분리해서 움직인다. 익숙해지면 한 번에 부드럽게 이어서 원을 그린다.
특히 머리 아이솔레이션은 골치 아팠다. 평소에 머리의 움직임은 고작 도리도리 끄덕끄덕이 다였는데, 낯선 방향으로 머리를 움직이려니 목과 어깨가 놀라서 찌릿찌릿했다. 이게 춤을 추는 건지 도수치료를 받는 건지. 춤을 잘 추려면 몸을 잘 풀어줘야겠구나, 운동을 병행해야 하나? 매주 딴생각을 하면서 안 쓰던 근육을 조금씩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신체 분리 마법처럼 목이, 어깨가, 가슴을, 골반을 따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는 경험이 신나서 거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몰래몰래 씰룩씰룩거렸다. 출근길 집 엘리베이터 안에서,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양치하면서.
춤을 배우면서 옷 입는 스타일도 넓어졌다. 춤 영상을 자주 봤고 댄서들이 즐겨 입는 스타일을 따라 입어 보기도 했다. 회색 스웨트 팬츠나 버클이 달린 검은색 조거 팬츠를 사서 입고 수업에 갔던 날에는 이상하게 춤이 더 잘 춰지는 거 같았다.
"춤은 옷이 90%, 아니 100%야.
팀에 비보이 출신 아트디렉터 차장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지난주 금요일에는 반차를 내고 머리를 바꿨다. 꽤 유교걸로 살아온 나에게 '안 하던 짓 해보기' 중 하나는 파격적인 색으로 염색하기였다. 이런 나에게 부장님은, 은정아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딱 2단계만 더 튀게 해. 라는 응원(?)을 해주셨고 미용실 의자에 앉을 때까지 머리 색을 고민하다가 결국 연보라색으로 시크릿 투톤 염색을 했다. (3일만에 색이 다 빠져서 은색이 됐는데, 이게 더 맘에 든다.)
오늘은 바뀐 머리로 춤 수업을 들었는데, 어 뭐지? 나 잘 추는 거 같아.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다. 머리 바꿨네요? 네 선생님, 머리 색 바꾸니까 춤도 더 잘 춰지는 거 같아요. 선생님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원래 춤은 머리빨이에요.
춤 학원에 등록했을뿐인데 나는 약간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춤을 내 맘에 들 때까지 추려면 앞으로 3년은 걸릴 것 같다. 그래도 처음 시작했을 때 바삭바삭거리던 무릎은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고 있다.
뻔뻔한 질문 #15. 안 하던 짓
'나랑은 정말 안 어울려.'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나요?
진짜 안 어울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