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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Nov 09. 2020

발가벗은 재생목록

같이 여행을 가면 플레이리스트를 훔칠 수 있다.

좋은 노래는 교통사고처럼 만난다.


좋아하겠다고 마음먹어서 좋아진 곡이 있었나? (팬심 제외)

택시에서, 버스 안에서, 카페에서, 멜론 추천곡에 떠서, 실수로 다른 곡을 들으려다, 길을 걷다 가게 스피커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의 축복으로, 친구가 알려줘서, 걔가 좋아해서.

다, 어쩌다 마주친 곡들이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서 좋아진 곡은 한 곡도 없었던 거 같다.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음악을 이용만 한다면 모를까.


음악은 귀가 아니라 마음이 듣는다.

아 좋다. 아 슬퍼. 아 설레. 아 신나. 아 뭔가 뿜뿜. 아 갑자기 비련의 주인공.

음악에 빚을 지면 못 가본 곳까지 잠깐 다녀올 수 있다.




 첫 회사 첫 휴가로 제주도 여행을 갔다. 계획에 없던 여행, 계획에 없던 동행들이었다. 대학 때 사랑과 정열을 담아(밤을 샜)었던 동아리가 있다. 동아리 활동이 끝난지는 5년. 얼굴 한번 보자, 밥 한번 먹자 했던 그 시절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했다. 동아리 친구 한 명이랑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2주 동안 요양할 건데, 심심하면 와인 한 병만 들고 와.

그래서 냉큼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해 픽업 온 친구의 차를 탔다. 오랜만이었다. 친구도 친구의 재생목록도.

언젠가 동아리 술자리가 끝나고 여럿이 노래방을 간 적이 있다. 내 노래가 끝나자마자 친구는 안경을 빛내며, 은정은 ‘슈게이징’ 밴드 하면 잘 어울릴 거 같다고 했었다. 있어 보이는 이 워딩은 뭐지? 찾아보니 이런 장르였다.


‘노이즈 같은 노래’ (뭐어?)

‘신발만 쳐다보고 하는 노래’ (정준일이야 뭐야.)


아 놀리는 거야 뭐야~ 하니 손사래를 치길래, 내 노래가 어때서~ 하며 계속 놀렸던 기억이 난다. 다시 만난 친구는 여전히 슈게이징을 즐겨 듣고 있었다.


초보운전도 베스트 드라이버로 만드는 곡



T의 친구 H와, H의 친구 J, 그리고 T의 또 다른 친구 나. 게스트하우스 마지막 날 도착해 만나게 된 우리는 공교롭게도 모두, 서로 다른 광고회사 사람들이었다. 또 T를 제외하고는 동갑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교집합을 도움닫기 삼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T: 나는 누구 좋아하면 웃음소리 따라 하고 있더라.

나: 오 그럼 누구 좋아하고 있는지 들킬 수도 있겠네?

T: 아니 그런 거 말고, 남자든 여자든 인간적으로 좋을 때.


시계를 보니 아쉬워 벌써 12시


우리는 이동할 때마다 블루투스를 연결해 카오디오를 틀었는데, H가 운전하면 T의 재생목록을, T가 운전하면 H의 재생목록을 들었다.


H: 근데 T야, 이 앨범은 트랙이 언제 바뀌는지 모르겠어. 이 곡도 이전 곡도 한 곡 같아.


맞아 맞아. 나도 J도 동의했다. 처음에는 클래식처럼 한 13분쯤 되는 곡인 줄 알았다. 그렇게 멍 때리며 듣다가 혹시 운전면허 비공식 시험과목으로, 드라이브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구성 능력도 있는 거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도 잠깐 했다.



마지막 날 조식에는 아이유 메들리 (가끔 자우림도 섞였다.)가 포함되었다. 설거지하면서 아이유 얘기를 했었다. 스물셋, 스물다섯, 그때 어떻게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아이유의 이 영악함이 좋더라. 누구의 얘기였는지는 곡이랑 감상이 섞여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서울로 돌아가면 가끔 아이유를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믿고 듣는 플레이리스트도 있다. 나의 6년 지기 여행 메이트. 짐이 없는 편인 내 캐리어 반쪽을 대신 채워주는 친구 P. 여행마다 세미 이사를 다니는 P는, 여행지 거리에 상관없이 늘 음질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겨 온다. 덕분에 들으면 여행지가 자동 재생되는 곡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P가 선곡한 곡 중에 전주 듣자마자 감탄 안 한 노래는 아직까지 단 한곡도 없었다. 보컬리스트가 되려다가 패션디자인으로 방향을 튼 P는, 언젠가 자기 쇼를 열 때도 런웨이 곡을 기가 막히게 셀렉해 낼 거다.



나를 스쳐지나간 플레이리스트도 있다.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고기 굽고 , 짠하고, 떠들기를 한참. 멜론 어플이 있냐고 묻더니 잠깐 핸드폰 좀 빌려달라고 했다. 왜요? 내 플레이리스트가 너무 투명하게 드러날 거 같아 머뭇거렸다. (넷플릭스 재생목록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비번처럼,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도 잠금 기능이 있어야 한다!)


“갈 때 들어봐요.”


헤어지고 지하철에서 멜론을 켰다. 재생목록에는 10곡이 들어있었다. 김광석 뒤에 갑자기 EDM이, 집에 오는 길을 홀로, 잠깐 디제잉 클럽에 들러서,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가, 김건모를 지나 존박까지. 알딸딸해서인지 웃음이 났다. 내 취향은 3/10개쯤 됐다. 나도 10곡을 넣어줬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몇 개는 맞출 수 있을 거 같기도 하지만.



그래, 솔직히 나는 누굴 좋아하면 플레이리스트를 훔쳐 들었다. 그중에는 시들고 지겨워진 노래도 있지만, 오래 목록을 지키다가 이제는 원래 내가 좋아했던 것처럼 남은 곡도 있다. 물론 재생목록은 지금도 꾸준히 새롭게 리필되고 있다.

어쨌든 내 플레이리스트는 내가 만나온 사람들의 합이다. 나를 스트리밍 한다면 내가 겪었던 사람도 그때의 나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뻔뻔한 질문 #17. 플레이리스트
가장 처음 좋아한 음악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좋아하게 됐나요?
오래 좋아했던(ing) 음악이 있나요?
요즘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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