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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Nov 21. 2021

내 무릎은 바삭, 튀김이었다.

CCTV 댄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
그 누구도 모르게 음 비밀스런 사랑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
지하에서 위층까지 벨이 울릴 때까지


박진영의 <엘리베이터>라는 노래에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춤을 춘다. 아무도 모르게. 관객은 어쩌면 지루하게 CCTV를 지켜보다, ‘쟤 왜 저래?’ 하고 놀랄 경비 아저씨일 거다.


놀랍게도 춤을 춘지는 벌써 반년이 넘었다.

작심세달 배웠던 학교 댄스 소모임은 코로나 대유행으로 중단됐다. 내 춤 인생도 시작하자마자 이대로 끝나는 건가? 보내주려던 와중에 올해 5월(2021년), 댄서들을 모델로 광고를 찍을 기회가 생겼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파주 지하철 세트장에선 마지막 씬을 앞두고 댄서들이 단체로 춤을 맞춰보는 모습을 보면서 결심했다. 그래 춤을 추자. 나도 몸을 잘 쓰는 사람이 되어보자. 다음에 다시 댄서들과 광고를 찍을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전에 준비해보자.


그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처럼 댄스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알려주는 쪽집게 춤 학원. 공교롭게도 학원은 회사 앞에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8v_UXdBQtw

AI 모델과 댄서 크루가 춤추는 컨셉의 광고 - 출처 신한라이프


춤 잘 추는 사람들을 오래 동경해왔다.

자주 써서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댄서의 몸은 잘 차려입은 무대 의상 같아 보인다. 잘 춘 춤을 보고 있으면 잘 쓴 글 한 편을 읽은 느낌이 든다.

보아 언니를 보고 자란 초등학생 은정은, 되고 싶은 나에 대해 자주 상상했는데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가 춤이었다.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끝내주게 무대를 휘어잡는 나, 길거리 댄스 배틀을 구경하다가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어던지며 숨겨둔 춤 실력을 드러내는 나, 뭐 이런 스토리. 내성적 관종력과 자의식 과잉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춤을 출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반 대표로 또 학교 대표로 무대에 설 일이 종종 있었고 춤을 춰야 하는 순간도 생겼다. 쑥스러움을 잘 안 타는 편인데도 유독 리듬에 몸을 맡긴다는 느낌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머리랑 몸이랑 합의한 적 없는 막춤의 순간들은 뼈에 흑역사를 새겼고, 아 난 역시 몸치네. 이번 생에 춤은 아닌가봐. 결론 내리게 했다.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안 하던 짓 해보기'였다. 내 인생의 숙제들을 돌아봤다. 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이제 그만 못 출 때도 되지 않았나? 남은 인생은 더 이상 몸치로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부터 배워서 계속 추다 보면 언젠가 몸치의 상태는 벗어나 있겠지. 막연한 생각으로 일단 시작했다.




내 몸을 내 느낌대로 쓰기. 어떤 음악이 나오든 내 느낌대로 리듬 타기. 근데 그놈의 느낌이란 무엇인가. 작심세달 이것저것 배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느낌을 찾으려면 일단 기본기를 익히는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깎아가는 거다. 거울로 보이는 참을 수 없는 몸짓의 못생김... 춤 선생님은 자신의 몸짓을 보고 내적 갈등 중인 초보반 학생들에게 알파벳 얘기를 해줬다.



ABC 뭔지 알아야
Apple 만들든 Banana 만들든 I have an apple이든   있잖아요.

춤도 마찬가지예요.
기본기를  닦아야 춤을 빨리, 그리고 오래    있어요.


춤의 기본기 '아이솔레이션'

몸 전체는 고정시키고 하나의 부위만 분리해서 움직이는 거다.

예를들어 가슴 아이솔레이션은, 가슴을 오른쪽→앞→왼쪽→뒤로 하나씩 분리해서 움직인다. 익숙해지면 한 번에 부드럽게 이어서 원을 그린다.

https://youtu.be/-rPhOc1xGrw

0:07 휘슬 부는 안무에 들어있는 가슴 아이솔레이션 - 전소미- Dumb Dumb


특히 머리 아이솔레이션은 골치 아팠다. 평소에 머리의 움직임은 고작 도리도리 끄덕끄덕이 다였는데, 낯선 방향으로 머리를 움직이려니 목과 어깨가 놀라서 찌릿찌릿했다. 이게 춤을 추는 건지 도수치료를 받는 건지. 춤을 잘 추려면 몸을 잘 풀어줘야겠구나, 운동을 병행해야 하나? 매주 딴생각을 하면서 안 쓰던 근육을 조금씩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신체 분리 마법처럼 목이, 어깨가, 가슴을, 골반을 따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는 경험이 신나서 거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몰래몰래 씰룩씰룩거렸다. 출근길 집 엘리베이터 안에서,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양치하면서.


춤을 배우면서 옷 입는 스타일도 넓어졌다. 춤 영상을 자주 봤고 댄서들이 즐겨 입는 스타일을 따라 입어 보기도 했다. 회색 스웨트 팬츠나 버클이 달린 검은색 조거 팬츠를 사서 입고 수업에 갔던 날에는 이상하게 춤이 더 잘 춰지는 거 같았다.


"춤은 옷이 90%, 아니 100%야.

팀에 비보이 출신 아트디렉터 차장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지난주 금요일에는 반차를 내고 머리를 바꿨다. 꽤 유교걸로 살아온 나에게 '안 하던 짓 해보기' 중 하나는 파격적인 색으로 염색하기였다. 이런 나에게 부장님은, 은정아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딱 2단계만 더 튀게 해. 라는 응원(?)을 해주셨고 미용실 의자에 앉을 때까지 머리 색을 고민하다가 결국 연보라색으로 시크릿 투톤 염색을 했다. (3일만에 색이 다 빠져서 은색이 됐는데, 이게 더 맘에 든다.)


오늘은 바뀐 머리로 춤 수업을 들었는데, 어 뭐지? 나 잘 추는 거 같아.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다. 머리 바꿨네요? 네 선생님, 머리 색 바꾸니까 춤도 더 잘 춰지는 거 같아요. 선생님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원래 춤은 머리빨이에요.


춤 학원에 등록했을뿐인데 나는 약간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춤을 내 맘에 들 때까지 추려면 앞으로 3년은 걸릴 것 같다. 그래도 처음 시작했을 때 바삭바삭거리던 무릎은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고 있다.


뻔뻔한 질문 #15. 안 하던 짓
'나랑은 정말 안 어울려.'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나요?
진짜 안 어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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