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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Mar 17. 2020

잃어버린 선생님을 찾습니다

40분, 8cm에 15,000원.

‘제발 오늘은 말 걸지 마라.’


미용실 의자에 앉으며 생각했다. 피곤했다. 딱 40분. 머리만 자르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설 미용사와 나 사이. 그러나 마치 누가 먼저 침묵을 만드나 대결이라도 하는 것처럼, 요즘 근황부터 재밌는 일화까지 이야기를 듣고 또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미용실이 피곤했다. 손님만 이런 맘이 드는 건 아닐 거다. 분명 조용히 머리만 자르고 싶은 디자이너도 있을거다. 언제부터 스몰토크가 미용실 서비스에 포함되었는지. 부디 사장님은 수다에 관심 없기를 바라며. 미용실 의자가 조금 높아졌고 졸린 척 눈을 감아버렸다. 아, 그래도 방금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싸가지 없었다. 다시 눈을 떴다.



“오랜만에 오시네요?”

“사장님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가방 무거운 것도 여전하시고.”


다른 곳에 가기 전에 잠깐 들르는 곳. 미용실은 언제나 중간 일정이었다. 백팩에 노트북이며 책이며 공부할 짐을 잔뜩 지고 오게된다. 대학가 미용실에 그런 손님은 나밖에 없어선지, 아니면 서비스업 종사자의 영업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동했다.


“학기 시작할 때마다 오시고."

“어, 정말 그러네요. 그러려고 그런건 아닌데.”


세어보니 정말 그랬다. 왜 미용실에 자주 안왔을까? 머리 손질에 관심이 없어진 것도 있지만, 여기서 자르면 손질도 쉽고 기분 내키는 만큼 길러도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미용실 유목민이었는데 여기 오고는 규칙적으로 머리를 자르게 됐다. 돈가스 집은 많지만 돈가스 진짜 맛있게 하는 집은 잘 없다. 커트도 그렇다. 맞다, 이 집 커트 맛집이다! 잘 하는 집에서 머리를 하면 오히려 미용실에 덜 가게 되는게 아이러니 했다. 그리고 조금 감사해졌다.



“사장님 커트 진짜 잘하세요.” 거울로 사장님을 보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집에서 머리 말릴 때 보면 알아요. 솔직히 자른 날은 잘 모르겠는데, 평소에 좋아요.” 사장님이 슬쩍 웃는게 보였다.

“커트가 쉬운데 어려워요."

"저도 커트가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돈가스 집 많아도 잘 하는 집은 은근 없잖아요" 앗, 너무 의식의 흐름이었다.

"특히 남성분들 머리 자르고 나면 여기 이어페이스 지저분해지거든요."

"오 거기를 이어페이스라고 하는거예요?"

"네 여기서부터 여기.” 귀를 덮고 있던 옆머리를 들어올려 가위를 쥔 손으로 귀 주변을 동그랗게 가리켜 보였다.

"그거 대충 잘라서 그래요. 그래야 장사가 되거든. 빨리 다시 오니까."

“어쩐지. 사장님이 커트 해주시면, 한동안 미용실 올 필요 없더라고요. 별로 안 좋으시겠지만요 하하.."

“그래도 대충 못 잘라요. 그게 안 되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압구정에서 나와서 내 가게 차려버렸잖아요.”

 가르마를 갈라 길이를 맞추는 사장님 손이 정교해졌다.



“제가 요즘 가게 끝나고 학원 다니거든요.”

“사장님도 학원을 다니세요?”

“네, 커트 더 잘하고 싶어서요. 특히 여기 있죠. (어깨선을 가리키며) 여기가 되게 어려운 존이거든요.

“맞아요. 거기 거지 존이잖아요. 자꾸 뻗치고 지저분해지고.”

"거기 선생님이 엄청 깐깐하세요. 수강생도 인터뷰로 가려서 받아요. 수강료도 엄청 비싸고. 한 달에 600만원.”

“헉 거의 대학 등록금 아니에요? 지금도 커트 잘하시는데.”



“근데요. '기술'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요.”

“와… 선생님… 진짜 멋있어요. 진짜.”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이 확 트였다. 매학기 무미건조하게 커트 시간을 때우던 여느때와는 달랐다. 거울로 선생님을 쳐다봤다. 노랗게 탈색해서 질끈 묶은 머리.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에게 아우라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수강 계획서에도 그렇게 적었어요. 근데 예상은 했는데 진짜 성질나게 어려워요.” 선생님은 웃으며 양쪽 머리 길이가 이정도면 괜찮겠냐며 다시 확인했다.

“한번은 성남에서 여기까지 어머니들이 단체로 왔는데 머리가 다 똑같은 거예요.”

“같은 미용실 다니시나보다.”

“그니까.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놨더라고요. 본인이 할줄 아는 것만 하는 거지. 그것도 강요예요 손님한테는.” 머리 끝을 다듬는 가위질이 단호해졌다.


“요즘 어린 친구들 유튜브 보고와서 이 머리 해달라고 가져오면, 그게 그렇게 자극이 되더라고요."

“보통 '손님 이건 고데기예요~’ 그러고 안 해주던데.”

"유행도 계속 변하고 손님도 계속 달라지는 거죠.”

“크… 기술에서 자유로워지기. 다시 생각해도 진짜 멋있어요. 선생님 같은 분이 더 잘 되셨음 좋겠어요.”


선생님이 너무 유명해지시면 나는 커트를 어디서 해야하지 잠깐 걱정했지만, 그래도 생활의 달인에서 커트 장인으로 인터뷰도 하고, 유명 미용사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헤어스타일을 시연하는 선생님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사장님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샌가 선생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 웃음이 났다.



“근데 보통 이런 얘기하면, 다른 손님들은 거기 수강생 몇명이냐고 물어보던데.”

“왜요?"

“육백 곱하기 몇명하면? 보자… 헤엑? 버는 돈이 얼마냐고”

“우와 그것도 그렇네요. 선생님도 돈 많이 버셨으면 좋겠어요.”

“많이 벌면 좋죠. 근데 이번 수업 끝나면 또 영국 비달 사순에 커트 배우러 갈거예요”

“설마 그 광고에 나오는 비달~사순?!”

“맞아요. 거기는 커트를 진짜 이렇게(머리카락 몇 가닥만 쥐고) 한올, 한올, 할걸요? 또 얼마나 어려울까 으~” 선생님은 이미 비달 사순에 가 있는 사람처럼 신난 얼굴로 내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오늘도 엄~청 맘에 들어요!”

40분, 8cm에 15,000원. 잃어버린 선생님을 만나는 방법. 앉으면 불편했던 미용실 의자가 더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어떤 사람에게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스승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보냈을까? 아직 자기가 참 좋은 선생님인줄 모르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서로가 서로에게 언제든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알리기. 삶을 이해하는 폭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 그게 내가 꿈꾸는 세상이다.


뻔뻔한 질문 #2. 배움에 대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는 아니지만 '선생님'이 된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 준 건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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