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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Apr 01. 2022

낭비인간

"왜 1년 꿇었어?"


복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녔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3년, 대학교 5년, 합이 8년간 나를 따라다닌 질문이다. 대한민국 평범한 고등학생의 시간표에서 고작 1년 지각했을 뿐인데, 8년을 괴롭히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의 순수한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일은 꽤 혹독했다.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구구절절 인생 스토리 편집본을 읊는 일은 처음에는 슬펐고, 두 번째는 화났고, 결국에는 웃겼다. 좀 꿇으면 안 됩니까? 아무래도 이번 판은 틀렸어. 그때부터였다. 내가 마음 놓고 낭비인간이 된 것은.



"올해는 재수할 건데요?”

고3, 원서를 낭비했다. 남들 꽉 채워 쓰는 수시 원서를 한 장만 썼다. 학생회장 했으면 어디든 뽑아가겠지 하는 근거 약한 자신감 덕에 1년간 재수할 기회를 얻었다.


아침 6시 학원 봉고차에 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스마트폰에 일기 쓰기. 나는 왜 재수를 할까? 어떤 사람이 되려고? 살면서 가지고 싶은 키워드를 매일 추가했다. 하고 싶은 공부도 찾아서 했다. 논술이었다. 그동안은 글보다 말이 쉬워서 이참에 글쓰기 실력을 늘리고 대학도 가자 싶었다. 문제지 말고 원고지에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재수생인 것을 까먹는 느낌도 좋았다.


저녁 자습시간, 복도 책상에 1000자 원고지에 글을 쓰면 한 마디씩 던졌다. 국영수를 더 파지, 지금 한다고 늘까? 수업 복습은 다 했니?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매일 쓰는 게 좋았고 글이 느는 게 신났다. 1000자 원고지 묶음을 3권 썼을 쯤, KTX를 타고 혼자 논술 시험을 치러갔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그동안 공부한 모범답안들을 휴지통에 버렸다. 개운했다. 나는 그해 논술로 대학에 들어갔다.



“잘 못해도 해보면 안 돼요?”

카피라이터 인턴 3회 차. 생각을 나누고 함께 발전시켜서 또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는 작업이 재밌었다. 좋은 사수님들에게 많이 배웠다. 못생긴 브랜드도 예쁜 구석은 있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상대가 듣고 싶은 말로 번역하기. 광고주에게 9번 거절당해도 힘내는 마음체력. 취업 문턱에도 갔다. 최종면접에 합격해 연봉협상도 했다. 이제 익숙하게 잘하는 일로 착실하게 돈 버는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다. 저널리즘스쿨에 최종 합격하기 전까지는. 나는 광고주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PD가 되려고 준비 중인 친구들 틈에 섞였다. 다시 카페 알바생이 됐다. 수중에는 받을 뻔한 월급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돈뿐이었다. 아깝다, 그냥 가지. 엄마도 친구도 그리고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바보인 분야에서 조금 덜 바보가 되어가는 것이 더 재밌다. 솔직히 무섭긴 하지만, 어쩌라고? 될 대로 되라지.



“혼자인 것보다 재밌나요?”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다. 엄마와 친밀하게 지내는 목사님과 식사를 하는데, 옆자리에 앉자마자 몇 살이냐고 물으셨다. 내가 몇 살이더라? 맞다, 스물여덟이요. 그랬더니 서른 안에 결혼해! 하신다. (지금은 벌써 서른 하나다.) 내가 결혼할 사람을 방금 소개했었나 싶을 만큼 확신에 찬 말투였다. 예? 갑자기요? 그거 좋은가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은 안 했다. 어릴 때부터 나를 봐온 분의 애정표현인 것을 알기에. 그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예수 믿으세요’ 전도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다. 우리 함께 천국 가자 같은.



“천국은 낭비하는 자의 것”

낭비의 기준은 보통 타인에게 있다. 효율 만능주의 한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시간대에 산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20대 안에 취업, 30대 안에 결혼 등. 사회가 정한 이상적 기준에 개인의 라이프사이클을 맞추지 않으면 낭비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렇다면 나는 낭비인간이다남이 만든 질문에 불안해 하며 의심없이 정답을 쫓기보단 조금 느려도 ‘?’ 나만의 질문을 다는 낭비야말로 내가 원하는 길을 탐험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대한민국이 헬조선인 이유는 천국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세상에 모두에게 적용되는 천국은 없다. 대신 자기만의 천국만 있다.  우리는 자기만의 천국이 필요하다. 딱 인구수만큼의 1인용 천국.



뻔뻔한 질문 #1. 일에 대하여.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왜 선택했나요?
다시 선택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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