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편지. 너의 말. 너의 글.
오랜만에 네가 준 편지를 찾아서 읽어봤어.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서 그런가 그냥 평소와는 다를 것 없는 일상인데도 뭔가 더 고요해진 느낌이야.
그래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떠오르더라고.
그래도 꽤 오랫동안 감정의 파도 속에서 살아서 그런가, 약간은 감정이 하나둘씩 무뎌지는 느낌이긴 해.
며칠 전 밤에 잠깐 걸어가면서 했던 대화 기억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거기에 매여있게 된다고.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글쎄. 그건 아직 그만큼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아닐까.
한동안은 계속 그 생각에 매여있겠지. 계속 생각이 나고, 문뜩문뜩 떠오르는 생각들에 감정이 복잡해지고
머리가 아프고 그렇겠지. 그런데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나고 나면 차차 잊히다가 그 사건들을, 생각들을 다시
곱씹어봐도 아무런 감정이 안 들게 되더라고. 그러다가 그냥 흘러가버려.
정말 한동안 안건 드리다가 그냥 나중에 먼지 툭툭 털고 다시 보면
"아 뭐 별거 아니었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긴 해.
사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정작 감정의 파도 속에서 여태까지 허우적 대던 건 나였어.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지.
결국 너는 내가 희망을 봤다고 한 건 신경 쓰지 않는구나. 너도 결국 제멋대로 할 거면서.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결국 변하지 않았다고.
처음에는 사실 그 말이 단순한 원망, 질책으로만 들렸는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더라고.
그러게. 나는 왜 계속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죄책감에 계속 매여있었을까.
사실은 그렇게 안 아팠을 수도 있던 건데. 감정의 파도에서 계속 허우적대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질타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리고 그게 너에게로 투영이 되어버렸지.
그래서 아닐까 싶긴 해. 내가 널 조금은 더 힘들게 만든 이유가.
그런데 네 편지를 읽고 깨달았지.
감정의 파도 속에서 시간을 보낸 건 너도 있었지만, 나도 있었다고.
사실 지금까지 그 속에서 아무런 발전도 없던 건 나였다고.
네가 용기를 내어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잡아서 올려주려고 할 때
내가 한 행동들은 결국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거였던 거더라고.
사실 내가 한 행동들은 문제를 부딪혀서 깨지는 게 아니라, 그냥 문제를 덮고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덮어 씌운 거 더라고. 나는 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실패했지. 그냥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피함으로써 한동안은 생각을 안 한 거야. 그러다 네가 다시 '나'의 이야기를 꺼내보라고, 들어주겠다고, 같이 풀어보자고 함으로써 안 건드려졌던 감정 덩어리를 다시 천천히 발굴해내기 시작한 거지. 그리곤 나는 천천히 그 감정에 빠져버렸고.
너는 내가 용기가 있었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지.
네 말대로 여전히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치고, 연락을 하고, 서로에게 고민 상담을 하지.
아마 여행도 같이 갈 거고 말이야.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아.
그 감정의 파도 속에서 넘치도록 감성적인 상태를 맛보았고,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공허해질 정도의 기분도 맛보았으니.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왔으니.
이제는 안정적인 상태야.
그 기억들이 정말 앨범 속의 사진으로 남아서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러니 이제는 널 좀 덜 힘들게 하고, 헷갈리게 하고 그럴 것 같아.
Nothing has changed.
Yet everything has changed.
시간이 허락해준다면,
네가 허락해준다면,
나는 네 이야기를 더욱 들어보고 싶어. 사소한 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