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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지 않는 사람과 동행하는 법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by 요인영



조금 불리한 환경(?)에서 강사교육을 받고 있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시드니에서 개원하여 그곳에서 요가 수업을 하는 사람이다. 몇 해 전 선생님은 '호주에서 요가원을 열리라' 회원들과 강사들 앞에서 확언한다. 제한요소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 사람을 그곳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 단 하나의 힘은 확언(상칼파-의도, 행동, 내면의 메시지와 방향성 그리고 사랑)이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자금도 넉넉지 않았으며, 나이 어린 아들 둘과 자신의 결정을 확신하지 못하고 지지해 주지 않는 남편이 있는 상황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확언이고 뭐고 상황을 합리화하며 주변에 변명을 한 뒤 꿈을 접기 마련이지만 선생님은 그런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믿고 그냥 한다는 것.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한다고 말해놓고 안 하는 상황을 더 힘들어한다는 것. 기질과 성향의 차이가 여기서도 나오지만 게으른 완벽주의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낫다. 저리 계획도 없이 무모하게 짐 가방 하나 달랑, 애 둘을 달고 비행기를 탈 수가 있나 지금도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선생님이 하는 모든 얘기는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겪어보지 않은 일을 제 것인 양 포장해서 말하는 일도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사를 하다가 교육생을 받고 지도를 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확신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다. 내 것이라 여기는 것에 대해서 상대에게 주는 확신이다.


내 얘기하는 것을 남 얘기 듣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나로서는 사실 어찌 저럴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더 크다. 보통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말로 설명하지 못하고 내 것이 아니라 여긴다. 선생님은 정반대라 그 단단함이 사람을 질리게 하면서 동시에 끌어들인다. 한 사람의 매력만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은 위험하다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한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나에게는 두 명의 강사 동기가 있다. 인원이 이리 적은 경우는 드문데, 보통 적게는 5명 많게는 25명까지도 함께 참여하며 동기가 된다. 원장이 호주에 있다 보니 홍보가 잘 되지 않았다. 요가원에 다니는 회원위주로 강사과정을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레 소수 인원이 된 것이다. 인원이 적은 만큼 수련을 할 때, 수업한 내용을 나누고 연습할 때, 실습할 때 서로에게 의지하고 의지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자 버팀목이었다. 마치 세상에 둘 뿐인 사람들처럼 작은 일에도 서로 눈 마주치면 웃기 바빴다. 그런 날들은 가볍지만 단단했다.


그러나 불화는 급작스럽고 일방적으로 찾아온다. 한쪽이 등을 돌리면 다른 쪽은 그제야 길을 잃는다. 손을 놓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 손은 이미 식어 있다. 한 사람의 침묵은 두 사람사이에 틈을 벌린다. 불화는 겉보기에는 함께 만드는 듯하지만 실은 단 한 사람의 결심으로 시작된다.


불화의 시작은 동시적일 수 없다.


눈을 가렸던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말투가 다르고, 바라보는 목표가 다르고, 웃음의 결도 달랐다. 한때 의지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나를 지치게 하고, 나 역시 그들을 불편하게 했다. 가까웠던 만큼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그는 한번 본 동작을 잊지 않았고, 나는 한 번 들은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동작을 한 뒤에야 말을 이해했고, 난 말이면 충분했다. 그는 동작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에 보여주는 데 강했고, 난 이해하기 쉬운 말로 설명하는데 익숙했다.

불화의 뿌리는 비교와 그로 인한 질투 때문일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잘 되지 않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를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상대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질투는 상대를 지나쳐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으로 변한다. 그것이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나는 맞지 않는 사람과 동행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게 된 것이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삼십 대의 나는 자연스레 멀어지는 방법을 택했다. 눈치챈 사람들은 나와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수 없을 때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마음을 주지 않는 것. 그 상황에서는 진심인 것처럼 연기했다. 돌아서면 너무도 지쳤지만 그것 말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손절할 수 없는 관계는 언제 끓어 넘 칠지 모르는 냄비처럼 늘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렇다고 뚜껑을 열 수도 불을 끌 수도 없으니 그저 조심스레 불 앞을 지키는 수밖에.



neelakshi-singh-5fX6AAPTg-k-unsplash.jpg neelakshi/unspash


세상의 많은 부모와 부부가, 심지어 오래된 친구들마저도 이 과제를 현재진행형으로 풀어가고 있다. 애정이 남아 있을 때 맞추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애정이 식은 뒤에는 무엇이 두 사람을 계속 걷게 만드는가.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는 대신 서로의 이유를 알기로 했다. 이 길을 왜 같이 걷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목적만은 맞추었다. 목적이 같으면 걸음의 간격이 조금 어긋나도 다시 나란히 설 수 있을 테니.


그의 가방에는 그만의 짐이 내 가방에는 나만의 짐이 들어 있다. 무겁다고 투덜대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무엇을 들고 갈지 합의하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가방 속의 무게로 관계가 부러지기도 할 테니.


감정은 가능한 한 꺼내두지 않았다. 그의 거친 말은 그날의 날씨 같은 것이고, 내 날카로운 표정 또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날씨에 성질을 내지 않듯 서로의 기분에도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번갈아 두었다. 가까이 있으면 온기를 느끼지만 오래 붙어 있으면 타버릴 정도로 과열될 테니.


약속한 시간엔 늦지 않았고, 우린 서로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이 작은 믿음들이 벼랑 끝 가지처럼 붙잡을 수 있는 손이 되어줄 테니.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과 생활하고, 돌보고, 일하며, 때론 즐기기도 한다. 잠시 문제가 있었던 동기와 나는 위에 적은 내용을 본능적으로 행했다. 불화의 시작은 같지 않았지만 관계의 재설정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동행하는 법은 알지 못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서로 닮아 있었나 보다.


아마 그것은 정답을 나누는 힘일 것이다. 발을 헛디디는 순간, 누군가의 정답이 나를 붙잡아 줄 거라는 믿음, 그 정답이 다른 이들에겐 틀린 답일지라도 내 삶에서는 분명히 맞는 답이라는 확신.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콩깍지가 벗겨진 눈으로 그러나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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