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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이 Jun 05. 2022

우정도 나이를 먹나 봐

-쇼코의 미소

원아.

네 이름을 한 글자로 부르니 다른 사람 같아 왠지 수줍어져. 우리 사이엔 2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이에 대해 쓰려면 무척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야 하겠지만 오늘은 이 문장에 대해서 너와 얘기하고 싶어.  



-어떤 우정은 연애 같고, 어떤 연애는 우정 같다.                    

‘쇼코의 미소’라는 소설에 나오는 말이야.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너를 떠올렸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 소설에서 쇼코와 ‘나’, 그러니까 '소유'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학생 교류 사업을 통해 알게 된 후 비밀스러운 우정을 맺어.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키워준 할아버지가 계셔. 쇼코와 소유뿐만 아니라 쇼코와 할아버지 역시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                

 

한편 쇼코는 소유에겐 온통 솔직하고 어두운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할아버지에겐 밝고 사교적인 쇼코가 되어 편지를 보내. 쇼코는 소유를 진정 신뢰한 것일까, 아니면 불쾌한 감정을 쏟아내는 도구로 사용한 것일까. 둘 다일까.     

 

쇼코를 보며 친해진다는 건 뭘까를 생각해 봐. 나를 가감 없이 펼쳐 보여도 안전할 거란 믿음 안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 그러므로 친해지기 위해선 내가 마음을 열어 보인다는 기본 조건이 충족되어야겠지.      

                 

쇼코는 예쁘고 독특하지만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더 미스터리 한 인물 같기만 해. 힘든 일을 얘기한다지만 그 일은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도 잘 되지 않아.


그래서인지 소유는 쇼코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느껴져. 자기 이야기를 한정적으로 털어놓는 쇼코 본인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쇼코보단 자신에게 관심이 더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 어린 여자아이들 사이의 우정은 친구에 비추어 자신이 어떤지 끊임없이 비교하고 점검하는 법이니까.     

      

여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연애 같은 우정을 경험할 거야. 둘이 친해지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둘만의 세계를 만들잖아. 다른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공유하면서 비밀스럽게 친해지는 거야.


점점 그 친구를 닮아가고, 나에게 없는 그 친구의 빛나는 점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은연중에 그 부분이 내게는 없다는 걸 떠올리며 상처받기도 해. ‘친구’라는 단어에 의지해 만나더라도 누가 더 나은 모습인가를 탐지하는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니.           


친구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기류들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 거야. 소유는 연락이 끊겼던 쇼코를 일본에 가서 만나지만 이 사람이 내가 알던 빛나는 쇼코인지 확신할 수 없어. 아파 보이는 쇼코, 정서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 쇼코 앞에서 소유는 내가 더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의 공간으로 도망쳐 나와.      


소유가 쇼코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믿은 이유는 아마도 꿈이 있어서였을 거야. 가족을 힘겹게 지키는 쇼코보다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현실로 만들려고 열심히 살고 있었잖아.         

 

하지만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걸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그걸 알아보기란 아주 깊은 우물 속에 들어 있는 바가지를 찾는 일처럼 어려울 뿐이야. 있다는 짐작만으로 겨우겨우 밧줄에 의지할 뿐.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흔히 돈, 사는 동네, 직업들로 그걸 증명하려고 하지. 나의 내면은 이런 결과들을 만들어냈다고 말이야.      


소유도 쇼코에게 미처 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잘 되고도 싶고, 노력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소유는 운이라든가 재능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 같아.      


그게 원인인지 점점 뾰족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왜 그런지 정확히 이유를 댈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잘 되는 모습만 보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일들이 점점 민망해지긴 하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때부터 가족은 동력이라기보단 숨고 싶은 존재들이 되는 것 같아. 점점 모든 건 자기 탓으로 돌리게 되고.           


곁에 있지 않고 드문드문 연락을 취하는 동안 서로에게 말 못 할 일들과 감정들이 쌓여가지. 내가 초라해질까 봐, 또는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까 봐 마음을 숨기는 일들의 빈도가 잦아져 가지. 그건 쇼코와 소유만의 일은 아닐 거야.           


고백하자면 나도 너에게 열등감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있어. 너는 나와 비슷하지만 표현 방식은 완전히 반대편에 있지. 너와 내가 친해지게 된 이유도 순전히 너로 인해서잖아. 무엇이든 혼자서만 감당하려고 하는 나를 네가 자꾸 밖으로 불러내서.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너의 모습은 가감 없는 솔직함이었어. 잘못된 일이 있어 보이면 화를 냈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모두 불러 파티를 하며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았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 오랜 여행을 시작했던 네가 동생들 학비를 다 대주었던 언니이기도 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 혼자 있는 엄마를 늘 안쓰럽게 여겼던 것도.


 쇼코를 다 알았지만 제대로 안 건 없었던 소유처럼, 나도 너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만 본 걸까 가끔 궁금했어. 그렇게 자주 함께 맥주를 마셔댔으면서도, 모든 연애사를 공유했으면서도,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어.       


아주 간간히 통화를 하며 친구라는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몇 년 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너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다가 내가 그랬잖아.      

-나는 항상 네가 멋지다고 생각했었어.     

듣던 너는 박장대소를 했지.      

-전혀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없어. 나는 항상 꾸준히 직장 다니는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우리는 같이 킬킬 웃고 말았지.


가장 친한 친구라면서도 서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때가 되어서야 조금 알 것만 같았어. 우리의 인생은 고만고만하게 흘러간다는 걸. 쇼코나 소유 중에 뭐가 더 나은 인생이라고도 절대 말할 수 없어.

더 나아 보이는 인생이 있다고 해도 그건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의 일부분 인지도 몰라. 누구에게나 힘든 날은 있고 인생에서 결말은 아직 아무도 살아보지 않았잖아. 우리는 내가 좋은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일 뿐이지.           


이제 소설의 결말을 말해줄게. 결국 할아버지는 아파서 돌아가시게 되는데, 그제야 ‘나’는 쇼코가 이 사실-할아버지가 아팠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돼. 그리고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기 위해 소유는 쇼코를 한국에서 다시 만나. 그때 쇼코는 또 다른 사람처럼 보여.      


그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힘든 시간들이 그녀에게 다 녹아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그녀를 옭아매던 것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다른 인생을 살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그녀들에겐 이별이라는 공통점이 생겼으니 이제 진짜 우정을 나눌 시기인지도 모르겠어.             

   

오랜 시간이 지나야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쇼코를 보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어. 아주 오래 걸리는 우정도 있다는 걸. 정말 말하기 싫은 것들이 내게서 빠져나가 멀어진 후에야 우리는 새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걸. 쇼코와 소유의 변화가 시작될만한 지점에서 쇼코의 첫 모습을 서늘하게 기억하며 소설이 끝나버리지만 말이야.           


너에게 아주 오랜 연인 같은 친구이고 싶어. 새벽에 기숙사 휴게실에 갔다가 처음 만나 서로의 고민을 공유했던 때가 기억나. 알게 된 지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요즘도 고민이 있을 때만 연락해 두 시간씩 통화를 하고 있지.


 가장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던 연애 초기 같은 우정을 지나서, 이제는 문제가 있을 때만 서로를 찾는 연애 말기, 아니 부부 사이 같은 우정이야. 연결되며 쌓아 올린 시간들이 튼튼히 기반이 된 우정이지. 네가 나보다 설레고 재밌는 친구를 만날 수는 있어도 너의 요모조모를 다 아는 내게 결국 다 털어놓을 걸 아는 자부심이랄까.


연락이 한동안 없는 동안에 갑자기 네가 떠오르면 피식 웃곤 해. ‘요즘은 잘 살고 있군.’ 생각하지. 오늘은 별일 없는데도 전화를 걸어볼까 싶어. 사는 게 고민 덩어리니까 전화하면 무슨 얘기든 두 시간 넘게 수다 떨 수 있어.


 끊임없이 울렁대며 변하는 우리와 우리의 주변을 변함없이 공유하면서 우리가 늙어가는 걸 지켜보고 싶어. 계속해서 고민을 들였다 삼켰다 하며 어디까지 새사람이 될 수 있는지 오래도록 관찰하고 싶어. 이 연애 같은 우정이 진화하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하며 살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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