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과로부터 깨달은 것들
대형마트에 가려고 자동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이번 주 to do list 중 하나였다. 식재료품, 다 떨어진 화장지를 비롯해서 쇼핑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고, 오늘이 아니면 장을 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차가 막혀 한참 기다리다 겨우 좌회전을 하려고 보니 공사 중이다. 오랜만에 가는 거라 이 길이 공사 중인 줄 몰랐네. 다른 지름길로 경로를 바꿔 운전을 하다 보니 문득, 익숙한 옛 동네다.
속도를 늦춰 모퉁이를 도니 그 5층짜리 아파트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동수가 살던 곳. 잠시 속도를 늦춰 천천히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동수가 여기 산다는 건 알았지만 와본 건 처음이야. 마치 늦은 초대라도 받은 것처럼 나는 가만히 아파트 건물에 적힌 305동이라 적힌 숫자를 살펴본다.
동수의 얼굴은 눈이 크고, 코가 높고, 입이 컸다. 어린 나이에도 다소 부리부리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본 건 고등학생 때였고 그땐 다소 살이 쪄 포동포동해져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멀리 이사를 간 지 한참이 지났고 다시는 볼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동수를 떠올리면 항상 피식하는 웃음이 난다. 웃음의 저 밑에서 조각난 기억들이 둥실둥실 솟아오른다.
첫 번째 기억, 얼굴이 주황색으로 달아오르던 동수.
같은 반이었던 동수와는 일면식도 없었는데 별관의 화장실 청소를 청소구역으로 배정받으면서 일면식을 텄다. 우리 반 애들 중 여자애들 넷과 남자애들 넷이 그곳에 가서 청소를 하고 교실로 돌아오면 되었다. 항상 화장실 청소를 하러 갈 때마다 느끼는 거였지만 1학년들이 쓰던 건물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화장실은 허름하고 더러웠다.
더위가 무르익어가 방학을 얼마 앞두지 않은 초여름의 어느 날, 화장실 청소를 하던 남자애들이 쫓아왔다.
“우리 화장실 도구가 없어졌어!
어안이 벙벙한 여자애들을 상대로 남자애들은 마구 따졌다.
“너희가 가져갔지!”
“아니야, 우리 건 여기 있어. 우리 아니야.”
여자애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남자애들은 믿지 않았다. 특히 동수는 화가 났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동수는 내게 다가와 무어라고 따졌지만, 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취급받으니 억울했다. 점점 나도 같이 화가 났지만 종이 치는 바람에 서둘러 교실로 돌아왔다. 남자애들 험담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냐고.
자려고 누웠을 때까지 잔상이 남은 건 동수의 화난 얼굴과 그날 입었던 옷뿐이다. 비행기가 그려진 하얀 블라우스 위로 겹쳐 입던 주황색 조끼였다. 붉게 달아오르던 동수의 얼굴이 조끼의 색깔과 똑같았다. 문득 웃음이 났다. 이불속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자꾸만 자꾸만.
두 번째 기억, 땀을 흘리던 동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서로 패를 갈라 놀았다. 사춘기다운 호기심을 넉넉하게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관심 없는 척을 했다.
암묵적인 금기를 넘어 상대 성별을 가진 애들과 장난을 치거나 사이좋게 지내면 바로 그날 오후에는 칠판에 누군가 낙서를 했다. ‘태이 ♡ 동수’ 같은 것들이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 싸웠어도 얘기를 하긴 한 거라는 듯이 애들은 어김없이 킬킬댔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나를 놀려댔다. 항상 심심해서 놀릴 거리를 찾던 애들이었다. 내 뒤에 와서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얘기를 하는 거였다.
“야, 동수가 좋아하는 애가 누구라더라?”
“이름에 ‘태’가 들어가는 애 아니었냐?”
“아, 태극기?”
오, 이런. 그때는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가 들어가는 별명을 왜 그렇게 많이 지어댔는지 모르겠다. 성이 김이면 별명은 김치였고, 이름에 주가 들어가면 별명은 주사였고. 그런데 또 그런 별명을 지어 놀리면 왜 그렇게 화는 났는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리느라 책상만 노려보고 있다가 이윽고 한 소리 하려고 고개를 홱 돌리면 어느샌가 동수가 교실 문 앞에 나타났다. 나보다 더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나보다 더 주먹을 말아 쥐고 “그런 말 하는 자식 있으면 가만 안 둔다.” 외치면 남자애들은 사사삭 쓸어도 모이지 않던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침에 학교에 갔는데 작은 카드 위로 책상 위에 작은 포장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몇몇의 지나가던 친구들이 뭐냐고 호기심을 나타냈다.
“몰라?”
관심을 받는 일이 부끄러웠던 나는 상자를 서둘러 가방 속에 넣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친구와 얘기를 했지만, 신경은 가방 안에 쏠려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가는 길 앞 계단에 동수가 서 있었다. 열어봤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어, 어……, 아직.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걸 준 게 자기란 걸 알았냐고 물었던 듯도 하고.
저만치 서 있던 따라온 동수의 친구가 신경 쓰여서, 곧 여기를 지나갈 엄마가 떠올라서 안절부절못하느라 땅을 봤다 하늘을 봤다 하다가 운동화 앞코로 톡톡 풀을 찼다. 그저 집에 가고 싶었다.
동수의 이마에는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우리가 마주 보고 서 있던 건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도 동수는 손으로 몇 번이나 얼굴의 땀을 닦아 털어냈다. 나는 안쓰럽게 동수를 지켜보았다.
“원래 열이 많아서……, 휴, 땀이 많이 나.”
“그러니…….”
나는 가방을 뒤져 휴대용 티슈를 동수에게 건넸다.
“고마워.”
동수는 땀을 닦진 않고 연신 티슈를 만지작거렸다. 바스락 소리를 뒤로 하고 헤어졌다. 집에 가서 조심스럽게 카드를 열어보니 ‘그때 화내서 미안해.’라고 꾹꾹 눌러쓴 글씨체가 나타났고, 상자를 풀어보니 그 속엔 고운 소리가 나는 오르골이 나왔다. 오르골을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언제인지 알 수도 없을 때까지 그 오르골은 늘 그곳에 있었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오르골의 태엽을 감으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콸콸 쏟아지던 동수의 땀도 아련한 멜로디와 함께 같이 흘렀다. 그럼 나는 또 우물쭈물한 입 모양이 된 채로 혼자 킥킥 웃곤 했다. 그런 기억들이……,
그런 기억들이 어디 감추어져 있었는지 순식간에 솟아났다.
있었는지도 모를 기억들이었다. 아파트 주변을 뱅뱅 돌다 잠시 주차를 하고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무언가 찡한 기분이 되었다.
안 좋은 기억들에 대해선 수십 번도 넘게 떠올려봤으면서, 좋았던 기억 같은 건 다 어디로 가버리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믿었으면서, 내 인생은 젠장 왜 이 모양이냐고 물었으면서, 실은 나쁜 기억만을 떠올리려고 기를 쓰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쓸했던 것, 미워했던 것, 엉엉 울었던 것, 없어지길 바랐던 것, 떠났던 것들 대신에
설레었던 것, 좋아했던 것, 곁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 떠났지만 영영 내가 보내지 않을 것들을 떠올렸다.
그땐 싫었지만 돌아보니 좋았던 것,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는 따뜻한 것들, 너에 대해서도.
좋았던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아주 작게 심장이 일렁거렸다.
건물에 쓰인 305란 숫자를 바라보다 다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마트로 향하며 오늘 사야 할 쇼핑 목록을 다시 떠올렸다. 혹시 놓친 게 있는지 꼼꼼히 다시 집안 곳곳을 상기하며 되짚었다.
다음번 마트에 올 때는 십 분쯤 더 일찍 나와서 옛 동네를 한 번 걸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속에 있는 좋은 것들을 무엇이라도 더 많이 데리고 다시 여기에 와 봐야지 마음먹었다. 하나, 둘, wish list를 머릿속으로 써 나가며 좌회전을 위해 깜박깜박 방향지시등을 켰다.
22. 07. 01(금) 박태이
* "글쓰기와 사랑"을 주제로 브런치 매거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어떤 날에도, 평소처럼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슬프거나 나빴던 기억들에서 오는 삶의 깨달음이 크긴 하지만, 재밌고 좋아하는 일을 공유하는 기쁨도 크겠지요.
한편으로는, 마음먹는 순간 쓰고 싶은 좋은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싶기도 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생활 속에서 느낀 점을 책 속 한 문장과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놀러 오세요.
-박태이- @tae.i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