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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열일곱

이월의 아홉수

by 저나뮤나

어쩌면 그녀는 열일곱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나이 셈법 속에서, 2007년생인 그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열일곱인 줄 만 알았던 나와 서른 살 차이가 나는 그녀는, 내가 아홉수가 되는 해에 나란히 아홉수를 맞이해야 한다. 그래야 계산이 맞다. 내가 아홉수면 그녀도 아홉수. 사이좋게 나도 아홉수 하나, 너도 아홉수 하나. 열입곱인줄로만 알았던 그녀는 열아홉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그 무시무시하다는 아홉수가 둘이나 있다.


이제야 집안 분위기가 이해된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집 분위기가 최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름의 질서가 있고, 가족 중 누구도 특별히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원래도 하하 호호 화기애애한 곳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조용해지더니, 어느 순간 묵언 수행의 고수를 가리는 장(場)이라도 된 듯 고요해졌다. 그런데 올해는 두 아홉수를 담아내야 하는 해. 그 결과, 우리 집은 더 깊은 침묵으로 진화했다. 모두들 저마다의 경지에 들어선 듯하다.


아무튼 다시 열일곱인지 열아홉인지 그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문득 깨달은 것이다. 아... 열아홉이었어? 열일곱이 아니네. 아홉수야! 그녀... 그래서 그런 거야?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녀의 삶도 그리 녹록한 삶은 아니다.


아홉수의 그녀를 바라보며 전구를 떠올린다. 얇은 유리로 필라멘트를 감싸고 있는 동그랗고 투명한 전구. 그녀는 전구처럼 아름답고 필라멘트처럼 섬세하다. 동시에 한 번 실수로 떨어지면 천만 조각으로 부서질 것 같다. 늘 조심스럽다. 그녀의 빛을 지키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섬세한 성격으로 삶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피곤할지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 위에는 유독 걸림돌도 많고, 시끄러운 소리도 많고, 끊임없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 정보도 많다.


건강 문제도 그렇다. 문턱이 닳도록 병원에 드나드는 그녀의 일상은 가볍지가 않다. 게다가 그녀는 고등학교 시니어다. 소위 고3이다. 이 시기의 복잡함과 고뇌는 이미 예견된 것 아니던가. 한국의 입시를 지옥이라 표현하지만, 사실 미국의 고등학교도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입시나 시험에 대한 압박은 모두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 무림강호의 세계이고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쉬운 길도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쉬운 길을 택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그녀는 세상의 소음을 나름의 방법으로 필터링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평탄하고는 거리가 멀다. 가끔씩 전구를 닮은 그녀의 빛이 깜빡깜빡 꺼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아홉수의 그녀가 주렁주렁 어린 몸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저만치 나를 앞서 가고 있다. 그녀의 길은 점점 나와 멀어진다. 이제 그녀는 나를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그녀의 길은 나의 세계와 분리되며 내가 아는 세계와는 다른, 그녀만의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투명한 전구를 닮은 그녀의 삶이 언제나 눈부시기를 바란다. 자신의 빛을 따라가며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찾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깊고 진지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오늘도 식구들이 모두 들어앉은 집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조용함 너머에서 사부작사부작 그녀가 아홉수를 넘어 어른으로 계속 향해 간다. 아홉수를 살고 있는 너를 응원한다. 아홉수의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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