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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비문증

이월의 아홉수

by 저나뮤나

두 주 전쯤,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는 순간, 갑자기 눈에서 번쩍, 번쩍, 번쩍, 세 번 불이 났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눈을 뜨고 나니, 눈앞에 이상한 것들이 보인다. 기다란 실, 뭉뚱한 먼지, 어딘가 촌충을 닮은 구불거림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보는 신호들로 어떤 의미도 만들수가 없다.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엔 하루 이틀이면 사라지려니 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고 여전히 신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보과잉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급히 망막 전문의와 약속을 잡았다.


"This condition is called vitreous detachment."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미국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영어는 참... 길고 어렵다.


멍청한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았지만, 사실 내 심한 근시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그마저도 동공이 확장된 상태라서 무엇을 바라본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선생님은 설명을 이어갔다. "눈 뒤쪽은 유리체라는 젤 같은 물질로 채워져 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망막에 붙어 있던 유리체가 탄성을 잃고 떨어져 나가죠. 그러면서 시력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디태치먼트'는 망막 박리가 다였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또 다른 종류의 '디태치먼트'가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당황한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뭐를 먹거나, 뭐를 안 먹거나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라 했다.


안질환이라고는 백내장, 녹내장, 망막박리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였다. 선생님은 오른쪽 눈을 찬찬히 살피고, 왼쪽 눈을 살피셨다. "왼쪽 눈도 상당히 진행이 되었네요. 조만간 오른쪽 눈처럼 번쩍이는 불빛과 플로터를 보게 될 거예요. 그때 다시 오세요."


아홉수! 역시 아홉수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불운이 몰려오는 전조 같은 것인가.


비문증이 생겨 불편하다. 맞다. 없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이게 뭐 그렇게 불운이라고 말할만한 것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불운이라기 보다는 전환의 순간 같은 것 아니겠는가. 또 다른 삶의 리듬, 그 깊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말이다.


오랫동안 젊음을 쫓으며,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았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는 변화의 연속이다. 젊음 역시 변화의 일부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내가 그 이후에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에 달려 있다. 삶의 깊이가 세월과 함께 더해지는 것이다.


젊은 눈으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면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살펴야 할 때가 온 것이라는 신호같은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아홉수가 찾아왔다. 첫 신호로 비문증이 왔다. 이 시작점이 불운일 수 없다. 삶의 다음 단계를 향한 초대가 아니겠는가. 나쁘지 않다. 여기까지 왔다. 장하다. 마흔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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