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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아메리

이월의 아홉수

by 저나뮤나

올해로 다섯 번째 아홉수를 맞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쉰아홉 같은 기분이지만, 아홉,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마흔아홉. 등고선처럼 놓인 숫자들의 능선을 따라 다섯 번째 이정표를 지나는 중인게 맞다. 아홉 살까지 아홉수로 따지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 아홉수를 시작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까먹지 말고 잘 챙기는 것도 맞다.


다섯 번째 아홉수 이정표 외에도 올해 또 하나의 이정표에 다다른 것이 있다. 미국에 온 지 스무 해가 된 것이다. 스무 해가 얼마나 긴 시간이냐면, 내가 미국에 오던 해에 태어났던 아이들은 이제 모두 성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되는 동안,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성인이다" 이런 게 답이 될 리가 없다.


이십 년 전 한국에서 내 땅에 내린 뿌리를 손수 뽑아 이곳 미국에 옮겨 심었다. 흙도 달랐고, 믈도 달랐고, 기후도 달랐고, 계절이 흐르는 모습도 달랐다. 너무 다른 환경 덕에 그전까지는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생존의 뇌가 활성화되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한 번 활성화된 생존의 뇌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다시는 꺼지지 않으리라는 듯 앞만 보고 내달렸다.


이십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고 독립을 하여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 나가고 있을 것이다. 생존을 넘어 각자의 '존재 방식'에 대한 길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생존에 매달렸던 나는 이제야 성인의 꼴을 갖춰 그 아이들과 같은 등고선 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내 신분증의 나이가 어찌 되든 이제야 이 나라에서 스무 해의 경험치를 장착한 성인이 된 것이다. 안정과 위험, 정착과 유목, 안도와 불안이 끊임없이 충돌했던 이십년간의 미국 생활의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비로소 그 너머를 향해 갈 준비가 된 것 같다.


그 너머에 완벽이나 완성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건 불완전하고 사람은 미완으로 남는다는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너머의 시간 위를 착실히 걸으며 내가 된 나를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각 이정표를 지날 때마다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을 만나고, 알지 못했던 나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뒤를 돌아보니 동동 거리던 무수한 발자국들이 많이도 찍혀있다. 아마 앞으로도 동동 거리며 무수한 발자국들을 남기며 걷게 될 것이다. 그 너머로 간다 해도 크게 변하지 않을 테지만 부족한 채로 사랑하고 불완전채로 후회하고 다 알지 못한 채로 선택하며 계속 그다음 이정표를 향해 가고 싶다.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은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곳은 다시 아홉수. 여섯번째 아홉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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