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의 아홉수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꽤 잘 마셨다. 어디 가서 술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었고, 실제로도 많이 마셨다. 평소에는 경쟁심이 별로 없는데, 술자리만 가면 꼭 일등을 해야 할 것같은 기분이 들어 진심으로 이기기 위해 열심히 마셨다.
그렇다고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신 건 아니다. 그랬다면 진정한 주당이 되었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소주는 알코올 냄새가 거슬렸고, 청하는 밍밍했고, 매취순은 맛있었지만 취한지도 모르게 취하는 게 반칙처럼 느껴졌다. 위스키는 너무 썼고, 와인은 다음 날 머리가 아팠다. 고량주는 입만 대보고도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손을 놨다. 결국 어떤 술을 마셔도 가장 처음 마셔봤던 술, 맥주로 돌아왔다.
맥주를 좋아했던 이유는 탄산이 톡 쏘는 맛이 좋아서다. 다른 술들은 미각만 자극했지만, 맥주는 촉각까지 건드렸다. 한 번에 두 가지 감각이 충족되니 뭔가 남는 장사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잔에 맥주를 따를 때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긴장감도 좋았다. 다른 술들은 부으면 그대로 흘러내리는데, 맥주는 잘못 따르면 거품이 부르르 넘친다. 그게 묘하게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좋아해서 참 많이 마셨지만, 요즘은 그 맥주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체력도 따라주지 않고, 배도 부르고, 두 번째 잔부터는 잔을 타고 올라오는 맥주 특유의 비린내도 별로다. 그래서 한 번에 한 잔만 마신다. 거품을 1/10만 내서 잔에 따르고 세 번에 나눠 마신다. 그러면 배도 별로 안 부르고 맥주 비린내도 없이 맛있게 마실 수 있다.
오늘도 한 잔을 따랐다. 거품이 제대로 나지 않아 아쉬웠지만, 혼자 앉아 맥주 속 탄산이 올라오는 길쭉한 컵을 바라보니 마음이 풀렸다. 그때 친구들에게 영상통화가 왔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래간만에 수다를 떨며 마시다 보니, 짧게 여러 번에 걸쳐 마셨다. 세 모금이 넘었는데도 비린내 없이 맛있었다. 탄산이 죽어가는데도 싱겁지 않았다. 밥과 함께 마셨는데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거품이 어쩌니, 몇 모금이 좋으니 이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가장 맛있는 맥주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맥주다. 맥주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좀 심심하긴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천하의 대문자 I 인 나도 그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게 된다.
늦은 밤 갈 곳이 술집밖에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마셨던 술자리를 떠올리면 정작 술은 기억나지 않고 웃음만 남아 있다. 친구들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좋았고, 테이블 위로 쌓여가는 병들을 보며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에도 여섯 시간은 너끈히 떠들던 낭비가 좋았다.
현실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마흔아홉이 되어 마시는 맥주에는 친구들이 없지만, 쉰아홉이 되어 마시는 맥주에는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때는 다시 신나게 맥주를 마시고 싶다. 그리고 꼭 이 말을 친구들에게 해 주고 싶다. "야, 마흔아홉 아홉수에 딱 걸려 내가 맥주를 한잔 마시고 있었거든? 근데 그때 알았잖니. 내가 진짜 좋아했던 건 맥주가 아니라 너희였다는 거지 크-."
미래에서 벌써 도착한 친구들의 타박이 들리는 것 같다.
"야, 쟤 또 오바한다. 쓸데없이 심각해. 그냥 마셔. 깔깔깔."
그러니까, 마흔아홉에는 같이 못 마셨지만, 우리 쉰아홉에는 다 같이 맥주 한 잔 하자는 얘기다. 쓸데없이 오바하며 하릴없이 같이 웃자는 말이다.